1960년대를 관통하는 단어는 가난이었다. 우리나라는 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다. 61년 5·16 직후 혁명 구호 1호가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한다”였을 정도였다.
명문대학을 졸업해도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하는 게 쉽질 않았다. 당시는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진학하려면 모두 입학시험을 봐야 했다. 대학생 과외교사가 인기 있었던 이유였다. 대학 입학 직후 한 지인의 소개로 종로에 살던 한 아이를 만난 게 과외교사의 출발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이던 아이는 영특했다. 반에서 4~6등이던 아이는 날 만난 뒤 1등을 놓치지 않았다. 입소문이 빠르게 났다. 날 놓칠까 봐 그 부모는 입주 과외를 제안했다. 함께 살며 과외 교습을 할 기회가 생긴 것이었다.
염리동 산꼭대기에서 안암동 학교와 종로를 오가던 고단한 삶이 끝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사이 내가 가르치는 학생도 7~8명으로 늘었다. 스파르타식으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핵심을 잘 짚었고 공부하는 요령을 가르쳤더니 아이들의 성적이 올랐다. 10등 밖에 있던 아이들도 하나둘 5등 안으로 진입했고 경기·서울·경복·이화·숙명 등 명문학교에 진학했다. 부모들의 만족도가 높았다. 그때 열심히 나를 따라 준 제자들과 학부모님들께 감사드린다. 나는 공부를 가르쳤지만 그분들은 내게 장학금을 대준 셈이어서다.
당시 수입은 매달 10여만원에 달했다. 여기에서 문제가 생겼다. 돈을 너무 많이 번 것이었다. 대학원 졸업을 앞두고 학원을 차릴까 깊은 고민에 빠졌던 일도 있었다. 교재를 만드는 출판사를 차리면 더 많은 돈을 벌 것 같았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큰 수익보다 세상을 배우고 싶었다.
사회생활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마침 학부형 중 한 분이 회사를 추천해줬다. 한국마방적주식회사였다. 우리나라가 차관을 얻어 세운 다섯 번째 회사였다. 공채시험을 봐 당당히 입사했지만, 첫 월급이 8000원에 불과했다. 요즘 초봉을 200만원이라면 나는 과외로 달마다 2000여만원을 번 셈이었다.
하지만 좌고우면하지 않고 직장 생활에 전념했다. 젊은 사람일수록 기업은 어떻게 돈을 버는지 그 과정을 배우는 게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젊어서는 돈을 많이 벌기보다 버는 과정이 더 중요하다. 회사에서 조직과 인간관계는 물론이고 돈의 흐름까지 배웠다.
경제학에는 창조적 파괴라는 표현이 있다. 10만원을 파괴하고 8000원을 택한 건 더 큰 전진을 위한 작은 후퇴였을 뿐이었다. 회사에서는 고속 승진했다. 영업과 기획을 비롯해 인사·생산·재무·조직관리 등 모든 부서를 거쳤다.
어느 순간부터 독립하겠다는 꿈을 품었다. 무역을 하고 싶었다. 출퇴근하면서 실무 영어회화를 독학했다. 결국, 73년 칠성산업을 설립했다. 긴 인생을 돌아보니 ‘떠나고 버린 뒤’ 더 큰 복을 받았다. “고향을 떠나 서울로 가라”는 어머니의 말씀을 따라 서울에 자리를 잡았다. 고려대에 입학했고 과외 교사로 큰 돈도 만져봤지만, 박봉의 회사로 옮겨 인정받으며 세상을 배웠다.
도전이 나를 축복의 길로 인도했다. 모든 것이 주님이 주신 축복의 여정들이다. 안주하지 말고 떠나 도전하라. 그게 바로 성공의 시작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