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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두상달 (6) 위기가 기회 된 모험과 도전… 종합상사로 급성장

입력 2021-08-17 03:10:02
두상달 장로가 1983년 사업차 쿠웨이트를 방문해 아내 김영숙(가운데) 권사와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꿈 많은 대학 신입생 시절, 아직 예수를 믿지 않을 때 염리동 자취방에서 룸메이트가 자주 암송하던 영어 구절이 있었다. “더 로드 이즈 마이 쉐퍼드, 아이 쉘 낫 원트(The Lord is my shepherd, I shall not want)”.

내용도 모르고 친구 따라 외우게 됐고 그때부터 늘 입가를 맴돌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셨다. 어머니는 막내인 나를 두고 눈을 감을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손을 꼭 잡고서 “상달아 집을 떠나라”고 말씀하신 뒤 눈을 감으셨다. 어머니 말씀을 따라 쌀 한가마니 값만 가지고 고향을 떠났다. 이렇게 시작된 서울 생활은 힘들고 고달팠다.

고립무원이었다. ‘맨땅에 헤딩’을 해야만 했다. 그렇게 시작해 오늘이 있기까지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시편의 시를 암송한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중견기업에 다니며 회사 업무 전체를 배울 수 있었다.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 능력을 인정받아 고속 승진할 수 있었다. 그런데 번민이 생겼다. 이대로 종업원으로 살 것인가, 경영자가 될 것인가. 인생의 향방을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 찾아왔다. 직장에 묶여 있다 보니 CCC 활동을 하는 데도 제약이 많았다. 흙수저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기도 했다.

1970년대 초반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다.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됐다. 수출만이 살길이었다. 정부도 많은 지원을 해줬다. 시대의 흐름은 분명 수출이었다. 73년 사표를 내고 무역회사인 칠성산업을 시작했다.

모험이고 도전이었다. 바이어를 만나고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등 무역 관련 기관을 수시로 찾았다. 외국 바이어에게 수출 물품을 소개하는 편지도 수시로 썼다. 한창 재미있게 일하던 때 사달이 났다.

그해 말 1차 석유 파동이 났다. 중동전쟁으로 석유 값이 일시에 폭등해 세계 경제가 마비됐다. 무역 업무도 암초를 만나 힘들어 하던 중 한 지인이 날 찾아와 수세미 공장을 헐값에 인수하라고 제안했다. 또 도전하기로 했다.

인수 직후 홍콩의 잡화상을 만났고 수출 길이 열렸다. 다행히 주문량이 많았다. 우리 공장 생산량으로는 납기를 맞출 수 없어 하청까지 줘가며 수세미를 실어 날랐다. 위기가 기회가 된 셈이었다. 이후 칠성산업은 종합상사처럼 모든 걸 수출하는 회사로 성장했다.

샘플가방을 들고 오대양 육대주를 누비며 시장을 개척하는 수출역군으로 살았다. 건축과 부동산 개발, 심층수와 의료기 사업 등으로 비즈니스 영역도 다변화됐다. 도전과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일했다. 사업이 자리잡으며 복음적인 활동도 감당할 수 있었다. 살아온 여정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이자 축복이었다. “하나님이 나의 선한 목사이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나이다”.

정리=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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