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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두상달 (8) 평신도 정성 모아 ‘복음화 센터’ CCC회관 세워

입력 2021-08-19 03:05:05
1971년 완공된 서울 중구 정동의 CCC회관 전경. ‘월간 CCC’ 표지로도 수 차례 사용됐다.


한국이 20세기 최대의 영적 부흥을 이룩한 데는 훌륭한 영적 지도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분들이 지금도 계신 게 감사할 뿐이다. 순수하게 기도와 전도로 민족 복음화의 불씨로 살아온 수많은 평신도의 헌신이 있었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

한국CCC 운동에도 평신도들의 헌신이 녹아 있다.

“오늘의 학원 복음화는 내일의 세계 복음화”라는 구호 아래 한국CCC는 1958년 시작됐다. 학생 운동은 돈이 투입되는 곳이지 나오는 곳이 아니다. 결국 경제적으로 어려워지자 모금을 위해 김준곤 목사님이 66년 미국에 갔지만 68년 빈손으로 돌아오셨다. 허탈해진 CCC는 존폐 위기에 놓였다.

그해 8월 경기도 하남에 있는 영락양로원에 CCC 출신 108명이 모여 밤새도록 토론하고 울부짖는 기도 끝에 우리 힘으로 다시 해보자고 의기투합하기에 이르렀다. 이날 만들어진 게 ‘나사렛 형제들’이었다. 우리 형제들은 “민족 복음화와 세계 선교의 요람으로 쓰일 회관을 짓자. 이 자리에서 1000만원 헌금을 작정하자”는 공감대를 형성했다.

목표가 정해지자 몇 개월분의 급여나 반년 또는 연봉을 바치는 회원들이 나왔다. 전세금을 내놓거나 집을 팔아 헌금한 이들도 있었다. 신앙의 열정으로 가득한 이들의 마음은 순수했다. 민족 복음화의 소명 속에 부름을 받은 형제들이자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진 제3 집단이라 자부했다. 3대 헌신, 5대 강령도 만들었다.

그런 뒤 회관을 짓기 위해 땅을 수소문했다. 땅이 나왔다는 소식이 들리면 형제들은 퇴근 후 달려가 그 땅의 돌덩어리라도 붙잡고 기도했다. 남산으로, 수유리로 여러 곳을 찾아다녔다.

어느 날 정동 이화여고 맞은편 넓은 땅이 나와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가보니 너무 좋은 땅이었다. 러시아 대사관이 있던 자리라고 했다. 형제들은 여러 달 동안 저녁마다 그곳에 모여 기도회를 했다. 결국, 정부 소유이던 땅을 시세보다 싸게 불하받을 수 있게 됐다.

이것만도 기적이었는데 부족했던 건축비 중 일부를 미국의 기독 실업인 아서 디마스가 쾌척했다. 건축은 명지건설이 맡았다.

김 목사님은 민족 복음화의 큰 그림을 그리셨다. 현장 책임자에게 한번은 센터에 담겨야 할 정신을 설명했다고 한다. “이곳은 나라 살리는 장병 중에서도 핵심 요원이 훈련받고 세포분열해 전국을 조직화한 뒤 또다시 핵분열하고 들불처럼 번져 민족 복음화를 이룰 사령부입니다”라고 하셨다. 현장 책임자는 중요한 말이라 생각하고 설계도면 구석에 그 내용을 받아 적어뒀다고 한다.

어느 날 이 사람이 메모가 적힌 도면을 택시에 두고 내렸는데, 택시기사가 뭔가 살펴보니 형이상학적인 그림이 그려진 종이 구석에 ‘세포분열’ ‘복음의 밀수꾼’ ‘전국 조직화’ ‘핵심 요원’ ‘핵분열’ 등의 단어가 기록된 걸 보고 간첩의 물건으로 여겨 영등포경찰서에 전달했다. 이 일로 건축을 담당했던 직원이 경찰에 긴급 체포됐다 풀려나는 해프닝도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71년 21층 높이의 CCC센터가 문을 열었다. 본관 옆에는 1200명이 들어갈 수 있는 대강당까지 마련했다.

정리=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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