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미국 댈러스에서 ‘엑스플로72’ 대회가 열렸다. 전 세계 기독교인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전도훈련 집회였다. 56명의 한국대표단도 참석했다. 나도 나사렛 형제들 10여명과 함께 했다. 전 세계 CCC가 2년 동안 준비한 엄청난 규모의 집회였다.
미국은 대단한 선진국으로 별천지였다. 미식축구가 열리는 댈러스 코튼볼 운동장에 8만명이 모였다. 숙소도 번듯한 호텔이었고 뷔페에서 음식도 마음껏 먹을 수 있었다. 교실 바닥에 자면서 주먹밥 먹으며 집회하던 한국 상황과는 너무 달랐다. 우리와 달리 자유분방하게 옷을 입었지만, 간절히 찬양하고 기도하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보며 문화충격도 받았다.
마지막 날 김준곤 목사님이 인사하러 단상에 올랐을 때 ‘사고’가 났다. “한국의 서울에서 2년 뒤 30만명이 모이는 ‘엑스플로74’ 집회를 개최하겠습니다”라고 발표하신 것이었다. 우리는 모두 귀를 의심했다.
“30만명이라니요. 3만명도 어려운데 목사님 숫자 실수하신 거 아니세요”라며 수군거리는 우리에게 김 목사님은 “내 말이 다 맞는다”고 하시며 웃으셨다. 원래 목사님이 숫자 개념이 없으시긴 하셨지만, 사전에 상의도 없이 하신 갑작스러운 발표에 모두가 혼란스러웠다.
물은 쏟아졌다. 어떻게 해서라도 준비를 해야 했다. 목사님은 나와 장만기 박사를 필리핀에 있는 CCC 동아시아 본부로 보냈다. 큰 대회 준비에 필요한 모든 걸 배워오라고 하셨다. 한 달 반 동안 교육을 받았다. 아쉽게도 필리핀 연수 후 장 박사는 진로를 바꿨다. 훗날 한국기독실업인회(CBMC) 총무로 봉사하다 인간개발원을 세웠다.
나사렛 형제들도 또 나섰다. 73년 여름 수련회에서 1억2000만원의 헌금을 작정했다. 800여명이 참여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메일 복음 메시지를 담은 ‘순 칼럼’을 싣는 데 필요한 홍보비였다. 일간 신문에 실린 최초의 복음 칼럼으로 2년 동안 연재했다. 지금 생각해도 파스칼의 명상록 ‘팡세’에 필적할 만한 현대적 고전으로 간결하면서도 복음의 깊은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집회 때마다 ‘절대 신앙’ ‘절대 헌신’ ‘절대 행동’을 다짐했고 헌금도 했다. 헌금을 계수하는 이들이 가끔 눈물을 쏟을 때도 있었다. 헌금 주머니에서 “바칠 게 없습니다. 대신 머리를 잘라 바칩니다”라는 글과 함께 머리카락 뭉텅이가 나오기도 했다. 반지와 시계도 나왔다. 계수 요원들은 그 자리에서 부둥켜안고 울고 울었고, 이 이야기를 들은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민족 복음화의 불씨를 품었던 나사렛 형제들 모두가 너무 소중했다. 예수에 미친 사람들이었다. 예수에 취한 사람들이기도 했다. 나는 나사렛 형제들 서울 지구 회장과 전국 중앙회장으로 봉사했다. 20여년 동안 여름에는 전국대회, 겨울에는 원단 금식 기도회에 참여하느라 한 번도 휴가를 못 갔다.
때론 어딘가에 미친 사람들이 역사를 만든다. 인간은 무엇인가에 미쳐 살아가기 마련이다. 어차피 미쳐야 한다면 똑바로 미치자. 예수에 취하고 예수에 미쳐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