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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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트루디 (4) 첫 데이트 후 “우리 함께 기도하자” 빌리의 말에 감격

입력 2021-09-29 03:05:04
트루디(왼쪽) 사모와 극동방송 이사장 김장환 목사가 밥 존스 고등학교 재학 시절, 데이트 중에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


빌리(김장환 목사)는 학교 내에서도 항상 유명했다. 그는 동양인이었지만 축구부 주장이었다. 웅변대회 상도 언제나 빌리의 차지였다. 지역대회와 사우스캐롤라이나주 대회, 전국 웅변대회까지 휩쓸었다. 한국인 유학생이 고등학교 웅변대회에서 최고의 상을 받는 건 굉장히 놀라운 일이었다. 이 때문에 빌리는 학생들 사이에서도 스타 중에 스타였다.

밥 존스 고등학교에서는 남학생이 여학생에게 데이트를 신청할 땐 반드시 편지를 먼저 보내야 한다. 규정상 교내 극장에서 공연되는 연극이나 음악회는 남녀가 함께 봐야 했기 때문이다. 여학생들은 공연이 있는 날이면 누구에게서 초청장이 올지 다들 궁금해했다.

나는 보통 초청장을 5장쯤 받았는데 빌리도 내게 편지를 보낸 남자들 중 하나였다. 나는 빌리의 이름이 적힌 초청장을 보면서 가슴이 설렜다. 친구들이 말하길 “그 편지는 빌리가 여학생에게 보낸 최초의 편지”라는 것이다.

‘식당에서 서빙하고 있는 모습이 좋아 보였어. 나와 함께 음악회에 가지 않을래.’

편지를 통해 빌리가 나를 눈여겨보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렇다면 왜 진작 편지를 보내지 않았던 걸까.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빌리는 영어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서 그 러브레터를 썼다고 했다. 그는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음에도 가난한 동양 남학생한테 관심이 없을 거라고 짐작해 편지를 망설이고 있다가 나를 보고 용기를 냈다고 했다.

음악회에 가는 날, 나는 벨벳 드레스를 한껏 차려 입고 빌리 앞에 나타났다.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은 빌리에게 선택을 받았으니 다른 여학생들에게 얕보이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아침 일찍부터 치장했다. 빌리 역시 멋지게 차려입었지만 다소 긴장한 모습이었다. 키 166㎝에 불과한 빌리는 내 키가 자신보다 더 크진 않을까 걱정되는 눈치였다.

하지만 나는 빌리가 키가 작다는 사실에 별로 개의치 않았다. 빌리가 공연장에 들어갈 땐 나를 먼저 들여보내줬고, 안에서도 의자를 빼주는 등 신사다운 매너를 충분히 갖추고 있었기에 외모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음악회가 끝나고 헤어질 무렵 빌리는 기숙사 앞에서 내 앞을 턱 가로막았다. 그 또래 아이들은 보통 “잘 자라”라고 말하고 헤어지는 게 고작이었던 터라 나는 좀 긴장됐다.

‘혹시 5인치 거리 규정을 어기고 키스라도 하려나.’

나는 사람의 속을 꿰뚫어보는 듯한 빌리의 시선에 얼굴이 빨개졌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의 얼굴이 점점 더 다가오더니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 헤어지기 전에 함께 기도하자.”

우리라는 말에 가슴이 더 뛰기 시작했다. 기도 내용은 단순했다. 음악회에 잘 다녀온 것에 감사하고 앞으로도 빌리와 내가 하나님 뜻대로 살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키스를 할 것이란 내 순진한 예상과 달리 첫 만남을 하나님께 감사 돌리는 빌리의 모습에 나는 감격했다. 그때 나는 ‘이 남자의 신앙과 인격이라면 앞으로 계속 만나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리=박효진 기자 imher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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