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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트루디 (6) 나의 청혼에 “대학부터 졸업하라”… 증표로 반지 교환

입력 2021-10-01 03:05:04
밥 존스 대학교 재학 중 교제하던 시절의 트루디(오른쪽) 사모와 김장환 목사.


내가 고등학교 3학년, 빌리(김장환 목사)가 대학교 2학년이 됐을 때 우리는 정식으로 데이트를 시작했다. 지금 생각하면 좀 우스운 얘기지만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빌리에게 “결혼하자”고 제의했다.

“난 대학 졸업 안한 여자와 결혼 안 해.”

나는 진지하게 이야기를 꺼냈는데 빌리는 내 말을 단칼에 잘랐다. 그러면서 “나와 결혼하고 싶으면 대학을 졸업하라”고 말했다. 빌리가 대학 졸업 후 한국으로 돌아가 버릴 것 같은 조바심 때문에 꺼낸 말이었지만, 사실 나는 한국에 가서 살 생각은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 한국은 너무 먼 나라이기도 했지만 아직 결혼할 나이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고마운 것은 빌리가 내 말을 흘려듣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대신 고등학교 졸업 반지를 서로 바꿔 끼면 어떨까. 그럼 우리가 서로를 믿고 있다는 증표가 될 테니까.”

빌리의 말에 눈물이 핑 돌았다. 서로 교제하고 있으면서도 정식으로 사귄다는 생각이 안 들었던 터라 그의 배려가 어떤 확신을 주는 것만 같았다.

이후 밥 존스 대학교에 입학한 나는 교육학을 전공했다. 어머니가 젊은 시절 교사를 하셨기 때문에 그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무엇보다 어린아이들을 가르치고 싶다는 열망이 있었다.

빌리와 같은 해에 대학을 졸업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공부에 전념했다. 학기 중에는 최대한 수강 신청을 많이 했고 방학 때는 서머스쿨(계절학기)에 다녔다. 집에서는 어머니에게 라틴어를 배워 학점을 채웠다. 어머니는 교사 자격증이 있으셨기 때문에 수업을 받으면 정규 과목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대게는 밤 11시까지 공부하고도 새벽에 일어나 또 공부했다. 어떤 날은 3시간만 자고 공부했던 적도 있다. 그러면서도 평일에는 식당에서 서빙을 했고 토요일에는 세탁소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르바이트를 했다. 하루하루가 정신없이 흘러갔다.

이런 각고의 노력 끝에 빌리가 대학교 3학년 때 나도 같은 학년으로 진급할 수 있었다. 그는 이미 4학년 과목을 상당수 이수한 상태였고 나는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였지만 빌리와 함께 공부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다.

‘빌리와 함께 졸업하면 정식으로 프러포즈 받을 수 있을 거야.’

부푼 마음으로 매일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했다. 하지만 어느 날 생각지도 못했던 위기가 찾아왔다. 도서관에서 가끔 마주치는 돈이라는 남학생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보고 빌리가 오해를 한 것이다. 나는 돈 옆에서 빌리에게 반갑게 인사했지만 그는 창백한 얼굴로 아무 말 없이 그냥 지나가버렸다.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나’ 하며 걱정했지만 크게 신경 쓰진 않았다.

그날 저녁 빌리는 기숙사까지 날 찾아왔다.

“그 남자 누구야.”

“돈은 도서관에서 알게 된 친구예요.”

내 대답을 들은 빌리는 손에 끼고 있던 반지를 빼주면서 말했다.

“우리 헤어지는 게 좋겠어.”

정리=박효진 기자 imher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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