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는 지난달 열린 제106회 총회에서 김은경(66) 익산중앙교회 목사를 총회장으로 추대했다. 기장 교단은 물론 장로교 최초의 여성 총회장이었다. 기장 68회 총회장을 역임한 고 송상규 목사가 김 총회장 시아버지로, 시아버지와 며느리 2대 총회장 당선도 이번이 처음이다.
지난 15일 서울 종로구 기장 총회에서 만난 김 총회장은 “여성 총회장에 대한 기대가 크다고 느끼고 있다. 저에 대한 부분이 아니라 변화에 대한 기대라 본다”며 “마음이 무겁기보단 어깨가 무겁다”고 말했다.
그는 “장로교 교단 최초 여성 총회장이 됐다고 해서 뭔가가 급격하게 바뀔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면서도 “하나의 자극적 모델은 된 거 같다. 변화의 불쏘시개 역할이 된 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 소감을 전했다.
이어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어려운 시기를 맞아 우리 교단이 제게 최초 여성 총회장이라는 영광과 함께 역사적 책무를 맡겨주셨다”며 “나라와 겨레를 위한 기도와 행동에 힘쓰고, 선한 역사를 이루는 데 빛의 도구로 쓰이도록 힘쓰겠다”고 밝혔다.
김 총회장은 교회의 대사회적 역할에 대해 강조했다. 김 총회장은 “6·25전쟁 군부독재 민주화 등을 거치며 우리 사회 패러다임이 바뀌었다. 사회가 다양해지고 그 안에서 많은 문제들도 발생했다”며 “기장이 그 속에서 십자가를 졌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는 “기장은 다른 것을 틀리다가 아닌 다르다 그 자체로 수용할 수 있는 탄력을 갖고 있다. 분열 대신 더불어, 함께 가기 위해 애써왔다”며 “소외 받고 사회적으로 약한 이들에 대한 관심을 계속해서 이어 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 총회장은 이번 총회 때 평신도에게 총대권을 부여한 것도, 목사 자격 조항 중 ‘신체 건강한 자’를 삭제한 것도 이런 기장의 정신이 반영된 증거라고 말했다. 그는 “이런 결정이 쉽게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기장 구성원들이 오랜 논의 과정을 통해 합의를 끌어낸 것”이라며 “기장의 정신이 살아 있다는 증거”라고 전했다.
최근 논란이 되는 차별금지법에 대해서도 김 총회장은 교단 내 의견을 모아가겠다고 말했다. 다만 그는 시간은 좀 필요할 것 같다고 했다. 김 총회장은 “이 문제를 정죄와 판단의 문제로 보는 경우도 있는데, 생명과 사랑의 문제로 봤으면 좋겠다”며 “우리 공동체가 이 부분에 대해 조금 더 숙의하면서 진행해야 할 부분”이라고 전했다.
김 총회장은 개인적으로는 생태 및 여성 관련 이슈를 어떻게 구체화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기장은 이번 총회를 마치며 기후 위기 극복과 창조 세계 보전을 위한 탄소 중립 선언문을 채택했다. 김 총회장은 기후 위기 상황과 관련해 기장 생태공동체운동본부가 좀 더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도록 도울 계획이라고 전했다.
여성 교역자의 임신출산에 관한 유급휴가 제도도 좀 더 구체화해 제도화하고, 한국인으로 태어나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이주민 가정에도 관심을 가질 계획이다. 김 총회장은 “계속 노출되는 아동 폭력에 대한 부분도 여전도회를 중심으로 도울 방법을 강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 총회장은 “돌이켜 보면 하나님 발길에 채여 여기까지 온 것 같다”고 했다. 대학 진학 대신 청년운동에 뛰어들었던 김 총회장은 할아버지처럼 따랐던 고(故) 함석헌 선생의 강권으로 한국신학대학(현 한신대)에 입학했다.
김 총회장은 “‘김은경, 호걸 노릇 그만하고 한국신학대학으로 오라’ 했던 할아버지 말씀이 지금도 생생하다”며 “목사가 돼서 여성이나 아동 등 소위 말하는 사회적 약자들의 우산이 돼야겠다는 마음이 있었다. 그런 고백을 하며 학교에 갔다”고 했다.
그는 민주 여성단체 송백회 창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5·18 마지막 수배자’로 알려진 고(故) 윤한봉씨의 미국 밀항 때 여동생으로 위장하고 마산까지 동행했고, 그 일로 서울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끌려가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임마누엘 하나님을 체험했다. 그가 ‘짝꿍’이라고 부르는 남편도 이 과정 속에 만났다.
김 총회장이 목회 하는 익산중앙교회는 그의 남편이 개척한 교회였다. 2001년 남편이 교통사고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면서 김 총회장이 목회를 이어가고 있다. 그는 “목사 안수를 받은 날이 남북정상회담이 열렸던 2000년 6월 15일이다. 목사 안수받은 것도 짝꿍이 권해서였다”고 말했다.
김 총회장은 “그동안 사역이 가능했던 건 모두 교인들 덕분”이라며 “개척할 때부터 함께해온 사람들로 아플 때 나를 위로해줬고, 언제나 나를 전적으로 신뢰해 준다”고 말했다.
그는 “총회장이 되고 난 뒤 첫 예배 때 교인들에게 총회장의 자리에 대한 생각을 나눴다”며 “‘내 십자가를 질 수 있느냐’는 부르심의 자리인데 기꺼이 기쁨으로 십자가를 질 수 있도록 중보기도를 부탁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