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2월,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미국으로 갔다. 그때 어머니 나이는 82세였다. 당뇨를 앓고 계신 터라 곧 천국에 가실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어머니를 축복해드렸다.
‘엄마, 제가 한국에서 사느라 자주 찾아뵙지 못했지만 마음만은 늘 함께 있었다는 걸 아실 거라 믿어요. 자식들을 모두 훌륭하게 키우셨으니 천국에 가시면 주님이 면류관을 주실 거예요.’
어머니는 내 예상대로 그로부터 한 달 뒤에 돌아가셨다. 장례식에는 남아프리카 짐바브웨에서 선교사로 활동 중인 첫째 롤런드 오빠가 참석한다고 했다. 나는 굳이 가보지 않았다. 이미 어머니의 영혼은 천국에 가 있을 텐데 장례식이 어머니에게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로부터 15년 뒤 비로소 아들 부부와 함께 어머니 묘를 찾았다. 생전에 어머니는 늘 둘째인 페기 언니가 모셨었다. 미국에서는 딸들이 부모를 모시는 전통을 갖고 있다. 어머니는 생전에 한국을 두 번 다녀가셨다. 한 번은 빌리의 후견인이었던 칼 파워스와 함께, 그리고 또 한 번은 페기 언니의 딸인 돈이 어머니를 모시고 왔었다. 어머니가 한국에 왔을 때 교회의 많은 성도가 어머니에게 선물을 해줬다. 어떤 교인은 옷을 여러 벌 만들어 선물했는데 참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남편은 어머니가 오셨을 때 용돈도 드리고 한국 이곳저곳을 관광시켜드렸다. 미국 사위들은 보통 장모에게 용돈을 주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어머니는 사위가 주는 용돈을 받고 무척 좋아하셨다. 어머니는 전두환 전 대통령을 비롯해 한국 정계의 높은 분들에게 초청을 받아 식사를 대접받은 적도 있다. “한국 사위 덕분에 호강한다”며 아이처럼 좋아하는 어머니를 보면서 나도 기분이 무척 좋았다. 어머니에게 잘해주는 남편이 자랑스럽고 고마웠다.
페기 언니는 어머니 생전에 최선을 다해 모셨다. 만약 내가 미국에 살았더라면 어머니를 직접 모셨을 것이다. 어머니는 내가 한국에서 시집가서 잘살고 있는지 언제나 걱정하셨다.
한 번씩 전화하면 “남편이랑 아이들을 잘 챙겨줘라” 하시면서 선교사로서의 사명도 강조하셨다. 어머니는 남편이 1973년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빌리 그레이엄 전도대회에서 통역을 맡은 뒤 미국에까지 이름이 알려졌을 때 무척 좋아하셨다. 사위가 유명해져서라기보다 우리 부부가 한국에서 선교를 잘하고 있다는 것에 안심하셨던 것 같다.
어머니는 결혼 전부터 혼혈아로 태어날 손주들 걱정과 아이들이 한국 생활을 잘할 수 있을까 늘 염려하셨다. 하지만 요셉과 요한, 애설이 성장하는 걸 보면서 안심하는 눈치였다. 나는 지금도 가끔씩 어머니가 보고 싶어서 혼자 조용히 눈시울을 붉히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