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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김의식 (1) 치유 목회 원동력은 ‘지역 의식 뛰어넘은 십자가 사랑’

입력 2022-01-07 03:10:01
김의식 치유하는교회 목사가 지난달 8일 서울 영등포구 국민일보빌딩에서 자신의 삶을 바꾼 예수님의 은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강민석 선임기자


내 고향은 전라남도 나주시 영산동 262번지다. 1958년 4월 20일 나주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5학년까지 영산포초등학교를 다녔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호남 출신이어서 받은 혜택보다는 상처가 훨씬 크고 많았다.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서울로 대학을 갈 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그러다가 군대에 가서 경험한 지역 차별은 생각보다 심했다. 졸업 후 장신대 신대원에 들어갈 때도 그랬고 이후 목회를 시작할 때도 그랬다. 신학대학원 시절에도 호남 출신 전도사들은 서울 시내 교회에서 교육전도사 자리를 얻기가 힘들었다. 지금도 호남 출신 목사가 서울 지역 교회에 들어가기는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렵다 한다.

혹독한 지역 차별의 상처와 고통의 연단 속에서 나는 호남의식을 더욱 강하게 가졌고, 차별받는 불쌍한(?) 호남을 더 사랑하게 됐다. 일찍이 이순신 장군도 “若無湖南 是無國家”, 즉 “호남이 없으면 국가도 없다”라고 호남의 중요성을 강조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나는 호남의 지역 의식을 뛰어넘어 십자가의 사랑을 더욱 깊이 체험한 후 이보다 더 소중한 치유의 은혜를 충만하게 체험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고통당하는 이들을 치유하기 위해 상담치유학을 전공했고 이 모든 것이 치유 목회의 원동력이며 은혜의 가시가 됐다.

아버님의 고향은 전라남도 해남군 화원면 장춘리인데 고향에서 사랑하는 형제를 잃었고 학교도 소학교만 나오셨다. 해방 직후 성령님의 인도에 따라 고향을 떠나 당시 무안군에서 하나밖에 없었던 성모의원에서 마동안 장로님을 만나셨다. 그분께 신앙과 의술을 배워 1950년 약종상 면허시험(현 약사고시)에 합격해 영생당약방을 여셨다. 또 심정택 목사님을 모셔 영산포중앙교회를 개척하셨고 초대 장로로서 1985년 전남노회(전남노회 광주노회 광주동노회 분립 전) 노회장에 이르기까지 일생을 주님과 이웃을 위해 헌신을 다하셨다. 그리하여 2000년 한국장로교대회 때 총회장 표창까지 받으셨다.

충성의 결과로 영생당약방은 하나님의 축복 속에 계속 확장돼 나주군 광산군 장흥군 강진군 영암군 함평군 무안군에 이르기까지 도매로 약을 공급하는 커다란 약방이 됐다. 당시 집에서 일하던 직원만 해도 상주 직원과 배달 직원, 가정부를 포함해 10여명에 이를 정도였다. 그래서 나는 나주군에서 제일가는 부잣집 아들로서 상당히 윤택한 환경 속에서 자랐다. 부모님은 할아버지 김달복 집사님과 할머니 박연심 집사님을 봉양했을 뿐 아니라 여섯 동생과 그 가족들을 초등학교부터 대학원 졸업까지 뒷바라지하셨다. 그 결과 모두 의사 약사 간호사 교수 건축사 미용사가 되었다. 이 또한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아닐 수 없다.

약력=한양대 공과대, 성서침례신학교, 장신대 신대원(교역학 석사), 장신대 대학원(신학석사), 프린스턴신학대학원(신학석사), 시카고신학대학원(철학박사), 호남신대(명예신학박사),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총회 부회록서기 및 서기 역임, 현 치유하는교회 위임목사, 치유상담대학원대학교 총장.

정리=박용미 기자 m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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