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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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김의식 (7) 림인식 목사의 신앙과 삶 보며 치유 목회의 틀 다져

입력 2022-01-17 03:05:03
김의식(왼쪽) 목사가 2008년 림인식 노량진교회 원로목사와 함께한 모습. 김 목사는 1984년 노량진교회에서 전도사 사역을 할 때부터 림 목사를 영적인 아버지로 섬겼다.


1983년 10월 군대 전역 후 봉사할 교회를 찾아 기도를 시작했다. 누나의 시아버지인 김두현 광주 서석교회 장로님이 당시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통합 회계였고 총회장은 림인식 목사님이었다. 그래서 아버지를 통해 김 장로님께 림 목사님이 담임으로 계시는 노량진교회에서 봉사할 수 있는지 알아봐 달라고 부탁드렸다. 당시 림 목사님은 한경직 영락교회 목사님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으셨는데 림 목사님께 장로교 정통 목회를 배우고 싶었다.

아마 총회 임원회가 열렸던 날로 기억된다. 아버지와 함께 총회로 림 목사님을 찾아뵈었다. 아버지는 모처럼 고급 식당에서 림 목사님과 김 장로님께 저녁 식사를 대접하려 하셨지만, 림 목사님이 극구 사양을 하셔서 종로5가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 앞 1000원짜리 백반집에 갔다. 그만큼 림 목사님은 첫인상부터 소박하셨다.

림 목사님께서는 그때 나에게 세 가지 질문을 하셨다. “우리 노량진교회는 사례가 적은데 밥 굶을 각오가 되어 있수?” “네, 저는 굶을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일이 많은데 잠 못 잘 각오도 되어 있수?” “네, 잠 못 잘 각오도 되어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속 썩이는 교인이 많은데 참고 이겨낼 각오도 되어 있수?” “네, 맡겨만 주시면 죽도록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그러면 오구려!” 세 가지 질문으로 노량진교회 교육전도사 면접에 통과한 셈이었다.

그 후 89년 미국 유학을 떠날 때까지 노량진교회 교육전도사부터 시작해 심방 전도사, 교육 목사에 이르기까지 6년 동안 충성을 다했다. 노량진교회에는 어려운 교인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야말로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는 치유 목회 훈련을 자연스럽게 받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나의 신앙과 목회의 아버지이신 림 목사님께 배울 수 있다는 것이 최고의 영광이고 축복이었다.

림 목사님의 신앙과 인품, 삶의 모범을 따라 나는 치유 목회의 틀을 잡아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나보다 먼저 소년부를 맡고 계셨던 김광식 전도사님(현 제주 충신교회 은퇴목사)을 자문하며 토요일 학교 앞 전도에 힘쓴 결과 200여명 모이던 소년부를 600명에 이르도록 부흥시켰다. 이후 신혼가정부도 이어받아 매 주일 성경공부와 친교 모임을 통해 2배로 부흥시켰다. 10여명 모이던 대학부를 맡았을 때는 여름 농촌 전도 봉사활동과 영성훈련을 강하게 해 기적의 응답을 체험했다. 교구 심방전도사를 맡아서도 2년 만에 1.5배의 부흥이 일어났다.

모든 부흥에는 먼저 교사들과 구역장들을 올바로 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들과 동역하면서 목표를 세우고 뜨겁게 기도하며 전도, 심방에 힘쓴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어느 부서든지 그 부서의 지도자들이 충성을 다하도록 훈련시키면서 앞장서 솔선수범했던 것이 부흥의 요인이었다. 노량진교회에서의 사역은 부흥의 기쁨을 누렸을 뿐 아니라 가장 존경하는 림 목사님 밑에서 목회의 틀을 잡았기에 내 생애 가장 행복했던 치유 목회 훈련기였다.

정리=박용미 기자 m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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