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전체메뉴보기 검색

[역경의 열매] 김의식 (8) “쉴 틈 없이 충성 다했는데 왜 딸을 데려가시나요”

입력 2022-01-18 03:10:01
김의식(왼쪽) 목사가 1986년 서울 노량진교회 전도사 시절 문채성 사모, 큰 딸 한나와 함께 휴가를 떠난 모습.


노량진교회에서의 목회가 전부 다 행복했던 것은 아니었다. 내 일생에 가장 후회되고 가슴 아픈 일이 터지고 말았다. 아내는 내가 심방 전도사이던 시절 나의 유학을 위해 북아현동에서 약국을 경영하고 있었다. 우리 집은 같은 동네 3층 옥탑방이었다. 당시 내가 맡은 5교구에는 경기도 외곽에 사는 교인들이 많았다. 새벽 일찍 교회에 가서 승합차를 몰고 심방을 다니다가 저녁 늦게 교회에 도착해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면 오후 10시 안팎이었다.

1987년 11월 3일, 한 번도 그런 말을 하지 않던 다섯 살 딸 아이 한나가 “아빠, 해태 종합선물세트 하나 사주면 안 돼요?” 라고 물었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한나야, 이제 성탄절도 가까워지니까 성탄절에 아빠가 선물하면 안 될까?” 하고 말했다. ‘아니요’가 없었던 착한 딸은 “네” 라고 대답했지만 못내 아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사흘 후, 그날도 밤늦게 퇴근했는데 딸아이가 감기 기운이 있었다. 딸아이에게 약을 먹여 재운 뒤 아내의 약국 문을 닫아 주려고 나갔다. 길어야 10분 정도 걸렸을까. 돌아와 보니 딸아이가 1층 대문 앞에 쓰러져 있는 것이 아닌가. 내가 나간 사이 딸아이가 깨어났는데 아빠도 없고, 대문은 밖에서 잠겨 있으니 베란다로 나와서 나를 찾다가 그만 떨어진 것이었다.

딸아이 장례를 치르고 나서 하나님께 원망이 생겼다. 교회에 가기만 하면 혼자 본당에 들어가서 하나님께 항변을 시작했다. “새벽 일찍부터 나가서 밤늦게까지 심방하느라 쉴 틈도 없이 충성을 다했는데, 그 보상이 딸아이를 불러가시는 것입니까. 주님, 할 말 있으시면 한번 해보세요!” 항변을 계속 이어가던 어느 날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김 전도사, 사랑하는 딸을 잃고 그렇게 힘드냐. 나도 너희를 위해 단 하나밖에 없는 죄 없는 아들을 잃었는데….”

나는 그날 거기서 무너지고 말았다. “주여, 사랑하는 딸을 천국에서 다시 만날 때까지 맡겨 주신 목회의 사명에 죽도록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나는 그날 이후부터 비로소 목숨을 걸고 목회를 하게 됐다.

하나밖에 없는 딸아이를 잘 돌보지 못해 사고로 잃고 나니 교인들 보기에도 너무 부끄러웠다. 더 나아가 아내에게도 면목이 없었다. 그런데 교인들을 통해서 주님의 큰 위로를 받았다. 교인들이 다가와 “전도사님, 저도 첫째를 잃었어요” “저는 막내를 잃었어요” 하면서 위로의 말을 건네는 것이었다. 나는 그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면서 헨리 나우웬 박사가 말했듯이 나의 여생을 ‘상처 입은 치유자’로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그해 성탄 예배를 마치고 해태 종합선물세트를 샀다. 혼자 교회 봉고를 몰고 노량진 동산으로 향했다. 그날따라 함박눈이 쏟아졌다. 눈밭을 헤치고 딸아이 묘지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용서를 구했다. “한나야, 아빠가 너와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선물세트 사 왔어. 이렇게 늦게 사와 미안하구나. 이제라도 아빠를 용서하고 아빠의 사랑을 받아다오.” 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 뜨거운 눈물이 두 무릎 위에 하염없이 쏟아졌다.

정리=박용미 기자 mee@kmib.co.kr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