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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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김의식 (9) 첫 목회지 성령께 묻자 “가라”… 눈물의 이민 목회 시작

입력 2022-01-19 03:05:03
김의식(원 안) 목사가 1992년 미국 시카고한인연합장로교회 위임예배에서 성도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김 목사에게 이민 목회는 눈물의 시간이었지만 잊지 못할 첫 사랑을 경험한 시간이기도 했다.


1989년 미국 프린스턴신학대학원에 장학생으로 입학한 후 1년 동안 열심히 일하며 공부한 결과 보스턴대학교(Th.D.), 에모리대학교(S.T.D.), 드류대학교(Ph.D.), 클레어몬트신학대학원(Ph.D.), 시카고신학대학원(Ph.D.)의 입학 허가를 받았다. 다른 대학들은 다 목회상담이 전공이지만 시카고신학대학원은 가족치료 전공이었다. 당시 시카고신학대학원은 종합대학병원 3개와 가족치료센터 12개를 가지고 있어서 이론과 실제를 함께 배울 수 있다는 점이 큰 매력이었다. 그래서 오성춘 장신대 교수님과 상의해 시카고신학대학원에 진학했다.

2년간의 박사 과정을 마칠 무렵 오 교수님께서 장신대 교수로 오려면 담임 목회 3년을 해야 한다고 하셨다. 기도하던 중, 시카고한인연합장로교회가 담임목사를 청빙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이력서와 설교 테이프를 전달했다. 그때 시카고 한미교회에 계시던 강신원 목사님(현 모스크바 장신대 총장)께서 “그 교회는 목사를 힘들게 하는 교회로 소문이 나 있는데, 첫 목회지로 그런 곳에 가면 다칠 수 있으니 안 갔으면 좋겠다”고 극구 만류하셨다. 그런데 기도하면 성령님께서는 “가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그래서 ‘목사를 어떻게 찢어 죽이는지 가 보겠다’는 마음으로 92년 4대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거기서부터 눈물의 이민 목회가 시작됐다.

시카고한인연합장로교회는 52년 역사를 가진 시카고를 대표하는 장로교회였다. 초대 박영희 목사님, 2대 노재상 목사님, 3대 권영배 목사님은 모두 다 열심히 목회를 하셨지만 교회와 힘든 관계 속에서 퇴임하셨다. 그런 과정에서 성도 400여명이 모이던 교회가 내가 갔을 때는 60여명만 남아 있었다. 권사님들은 푸념 삼아 “알곡은 다 날아가고 우리 같은 쭉정이만 남아 있어요” 하셨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위로했다. “쭉정이는 다 날아가고 알곡만 남아 있는 거예요.” 그렇게 시작된 이민 목회는 잃은 양 찾기에 주력한 끝에 부흥 일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1년 만에 200여명이 출석하게 되었을 때 시험이 찾아왔다. 예배당이 흑인 슬럼가에 있으니 백인 동네로 이사 가자는 의견이 교인들 사이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시카고 내에 있는 조그마한 한인 대학을 인수할 것인지, 시외에 있는 미국 침례교회를 인수할 것인지에 대한 견해차로 교회가 둘로 나뉘었다. 공동의회를 거쳐 시카고 케이스대학을 인수해 이전하기로 결의했다. 그런데 자신들의 뜻을 이루지 못한 장로님과 집사님들이 나에 대한 이상한 소문을 퍼트리고 다니기 시작했다. 문제를 일으키는 교인에게는 어떠한 해명도 통하지 않아 매일 눈물 속에서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그랬더니 모든 교인이 부족한 종을 신뢰하고 지지해 극소수의 반대자들이 코너에 몰리고 말았다. 결국 열 가정 정도가 다른 목사님을 모시고 교회를 개척해 나갔다.

세월이 많이 흘러 당시 나를 괴롭게 했던 장로님을 한국에서 만났다. 그 교회 부흥성회에 초청을 받고 가서 과거 장로님, 집사님들과 지난날을 용서하고 화해하는 은혜가 있었다.

정리=박용미 기자 m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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