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1월 호남신학대에 부임했다. 내려갈 때는 유배지로 떠나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고향이 좋았다. 강의 전에는 항상 찬양과 통성기도를 했다. 미국 신학대학원에 ‘Seminary is a cemetery’(신학교는 무덤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나라도 신학대학원에 입학할 때는 뜨겁던 신학생들의 신앙이 졸업할 때가 되면 재로 변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학생들의 영성에 불을 지피기 위해 강의 10분 전부터 찬양과 통성기도를 하면서 성령님의 불을 붙이는 일에 주력했다.
그러자 다른 교수들의 불평이 터져 나왔다. 신학대가 기도원이냐는 것이었다. 신학대에서도 마음껏 찬양하고 기도하지 못한다는 것이 참으로 아이러니했다. 그렇지만 무더운 여름날 창문을 다 닫는 한이 있어도 간절히 찬양하고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3년간 호남신학대에서 교수 생활을 하는 내내 웃음과 눈물과 감동이 있는 치유의 강의가 끊이지 않았다. 강의하면서 나 자신부터 치유를 받았다. 나는 신학생들을 치유함으로 치유의 물결이 그들의 가정과 교회, 나아가 대한민국과 세계로 확장되길 간절히 바랐다.
99년 9월 장신대 신대원 강의를 하러 서울에 올라갔을 때 신학의 멘토시며 내 진로를 사랑으로 이끌어 주시던 정장복 교수님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서울 화곡동교회에서 담임목사를 청빙하는데 가라는 것이었다. 호남신학대에 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어떻게 교회로 갈 수 있나 하며 있었는데, 정 교수님이 강권하셔서 기도를 해보겠다고 대답했다.
목회 현장은 날마다 새로운 말씀 준비를 하고 기도하는 영적 전쟁터지만 교수 생활은 준비된 강의를 되풀이하면 됐고 방학과 안식년 등 시간적 여유가 많았다. 경제적으로도 풍요로웠다. 그러다 보니 ‘목사가 이렇게 편안하고 풍요로운 삶을 누리며 살아도 되는가’ 하는 갈등이 싹트던 참이었다.
주말에 가족들과 저녁 식사를 하면서 딸아이에게 물었다. “아빠와 엄마가 서울로 목회하러 가려고 해. 앞으로는 이렇게 가족끼리 시간도 갖지 못하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워지고 힘든 삶을 살 게 될 텐데 괜찮겠니?” 그때 사랑하는 딸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 “아빠, 목사님은 고생을 해야 해요. 제 걱정하지 마시고 아빠가 기도하면서 결정하세요.” 이 얼마나 놀라운 믿음의 대답인가. 나는 그날로 화곡동교회에 가기로 결정하고 이력서를 보냈다.
호남신학대에서 교수로 있었던 시간은 내가 선한 목자로 연단 받는 세월이었다. 한번은 점심 식사 시간에 두 학생이 1000원짜리 학교 식당 티켓이 없어 수돗물을 마시고 있는 모습을 봤다. 그 순간 어려웠던 신학생 시절이 떠올랐다. 조교에게 학부부터 신대원에 이르기까지 점심을 거르는 학생 명단을 파악하도록 했다. 그리고 생활비 150만원을 제외한 교수 봉급과 교외 강사비, 교회 부흥회 사례비까지 털어 그들의 식대와 등록금에 다 쏟아부었다.
그렇게 3년을 지내다 학교를 떠나왔는데 2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수의 갓김치, 완도의 김, 해남의 전복, 목포의 젓갈, 김제의 쌀 등 특산물을 보내는 제자들이 있다. 돌이켜보면 내가 그들을 잘 가르쳤다기보다도 그들이 참으로 스승보다 더 훌륭한 제자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