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곡동교회 전임 목사님이신 김학만 목사님은 은퇴 후 김포로 가셔서 말씀교회를 개척하셨는데 말씀교회는 독립 교단에 속해 있었다. 그런데 평생을 우리 화곡동교회와 영등포노회, 총회를 위해 헌신한 목사님이 은퇴하신 후 독립 교회를 세웠다는 것이 목사 면직 사유가 됐다. 김 목사님이 그렇게 수모를 겪으시는데도 나는 도와드릴 수 있는 아무런 힘이 없었다. 그래서 묵묵히 인내하며 회복의 시간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부족한 종이 2008년 영등포노회 부회록서기가 됐다. 나는 노회에 면직된 김 목사님을 복직시켜 달라고 요청했고 김성규 목사님이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셔서 김규 목사님이 노회장이실 때 가까스로 김 목사님이 원로목사로 복직되셨다. 그 후 내가 2015년 노회장이 됐을 때 당회와 공동의회가 만장일치로 김 목사님을 원로목사로 추대했다. 또 뒤늦게나마 노회의 공로목사님으로 추대했다. 평생을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 충성을 다하신 김 목사님의 명예가 회복돼 이제야 후임 목사로서의 소임을 다한 듯이 너무나 기뻤다.
교회가 수습됐지만 그 여파는 남아 있었다. 제직회 때마다 담임목사를 쫓아내려 했던 장로들은 당회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말이 나왔다. 나는 그때마다 “이제 교회가 화평해졌으니 과거는 다 용서하고 하나 되어 나아가야 합니다” 라고 답변했지만 이런 발언들은 제직회 때마다 이어졌다. 결국 내가 부임한 지 6년 7개월 만에 몇 분의 장로님들이 조기 은퇴를 했다. 개혁파 장로들은 조기 은퇴 장로들의 원로장로 추대는 안 된다고 반대했지만 이제는 다 용서하고 화합해야 할 때라고 설득해 만장일치로 장로님들을 원로장로로 추대했다. 그분들은 교회를 떠나지 않고 다들 은혜롭고 행복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그 후에도 고소 건이 계속됐지만 당회가 힘을 받아 상처 난 교회의 치유와 부흥에 박차를 가했다. 감사하게도 그 환난 속에서도 교회는 갑절로 부흥해 새 예배당을 건축할 수 있었다. 우리 교인 중 부유한 사람은 없다. 그러나 개미군단처럼 온 성도들이 힘을 합해 250억원의 건축비를 감당했다. 나 역시 건축헌금을 해야 하는데 은행 잔고가 없었다. 그래서 세 식구 생활비 150만원을 제외하고는 강사비 모두를 건축헌금으로 바쳤다. 아무래도 생활이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성도님들의 사랑의 손길이 그때부터 펼쳐졌다. 어떻게 소문을 들었는지 심방을 다녀와 늦은 시간 집에 도착하면 집 앞에 쌀 라면 고기 생선 채소에 이르기까지 성도님들이 시장을 봐서 가져다 놓으셨다. 나는 그때마다 눈물이 핑 돌며 성도님들의 사랑을 느꼈다. 뜨거운 감동이 가슴 속에서 물밀 듯 밀려오는 것이었다.
그후 벌써 16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당시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말도 없이 큰 힘이 돼 주었던 목사님과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들에 대한 감사는 평생 잊을 수 없다. 그들의 수고와 희생은 주님께서 하늘의 상과 면류관으로 다 갚아 주시겠지만 나 역시 평생 갚아야 할 은혜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