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의 아내가 소설을 쓴다니 지청구도 많이 들었다. 사모란 남편의 뒤에 있는 듯 없는 듯 숨어 살아야만 한다는 보수 교단 풍토에서 소설을 쓴다니 부닥치는 저항은 아주 거셌다. 특히 작가들 사이에서도 친해지면 은근히 다가와 아픈 충고를 했다. “이건숙씨, 이번 글도 또 하나님이 어떻게 했다는 결론을 지었지. 그러니 작품성이 없잖아. 문학은 종교성을 띠면 끝장이라고.”
어느 땐 하나님을 믿지 않는 평론가가 신랄하고 신경 거슬리는 평을 쓰기도 했다. 내가 주제로 삼은 기독교의 심오한 진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참으로 이상한 일은 가톨릭이나 불교문학은 모두 수용하면서도 유독 우리 개신교는 그간 많이 나온 간증 문학 탓인지 문학성이 없다는 선입견을 주면서 수군거림의 대상이 됐다. 너무나 큰 장벽이었다.
교회 안에서도 핍박은 많았다. 중책을 맡은 시무장로 한 분이 교인들 보는 앞에서 당당하게 충고를 했다. “사모님이 소설을 쓰신다고요? 성도들은 삶에 쫓겨서 성경 읽을 시간도 없는 판에 그걸 누가 읽는다고 쓰려고 하셔요.”
그뿐인가. 어느 귀여운 여성 집사는 내게 다가와 생글생글 웃어가면서 이렇게 강요했다. “이 잡지에 실린 소설, 우리 신성종 목사님이 쓰신 걸 사모님 이름으로 내셨지요? 사모님이 어떻게 이런 글을 쓰시겠어요. 그렇지요? 어서 저에게만 맞는 말이라고 살짝 고백하세요.” 너무 엉뚱한 말에 나는 그저 웃기만 했다. 그게 자신의 말에 동의한 거로 아는지 그녀는 아주 신명난 표정을 지었다.
그뿐인가. 내 작품은 대부분 연재물이었는데 큰마음 먹고 ‘예수 씨의 별’이란 장편을 전작으로 써냈다. 글을 쓰면서 스스로 감동해 울면서 쓰는 작품은 많지 않은데, 이 장편은 중간중간 많은 눈물을 흘리며 집필했다. 연재와 전작 쓰기의 차이점을 그제야 알았다. 그런데 이 소설이 사람들에게 잘 읽히지 않았다. 어느 날 사랑하는 젊은 부부 집사가 다가오더니 조용한 카페로 가자고 해서 나는 그들과 대화를 나누려고 따라나섰다. 그들은 충고하기 위해서 나를 데리고 나왔던 것이다.
“사모님! 우리 부부가 이렇게 간청하면서 하는 말이니 신중하게 들어보세요. 사모님이 너무 아까워요.”
“네? 무슨 소린지 모르겠네요.”
“사모님을 위해서 충고합니다. 지난 일주일간 우리 부부는 사모님이 쓰신 장편 ‘예수 씨의 별’을 정독했어요. 그리고 밤새워 우리 부부가 잠을 설쳤어요. 사모님이 아까워서요.”
“전 그게 무슨 소린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데요.”
“사모님은 기독교 주제를 떠나서 작품을 쓰면 대성할 분이에요. 아주 기막히게 글을 잘 쓰시는데 그 달란트가 이렇게 기독교를 중심으로 쓰시니 주목을 못 받는 거라고요. 너무 아까워요. 우리 부부가 내린 결론은 꼭 한 번만이라도 기독교를 떠난 주제를 가지고 써보시면 책도 잘 팔리고 성공할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소설을 읽지 않아요. 지금 유명세를 타고 있는 작가들 별 것 아니에요. 사모님의 문제점은 바로 이것이니 제발 저희 말을 따라 한 번만 그렇게 써보세요. 히트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