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의 아내가 어떻게 소설가가 되었는가.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할 당시 내 생활은 정말 가난의 구렁텅이였다. 시부모 생활비, 시동생 둘의 대학등록금, 그리고 우리의 생활비까지. 남편이 벌어오는 돈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몽땅 그달 월급을 봉투째 바쳐도 모자라 동네를 돌면서 돈을 꾸러 다녀야 했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아이들은 겨울 간식인 사과를 먹고 싶다고 야단이지만 그걸 살 돈이 없었다. 어쩌다가 딱 한 알, 사과를 사 오면 남편까지 둘러앉아 모두 침을 꼴깍거렸다. 그걸 잘게 저며서 새끼 새들에게 먹이를 주듯 입에 넣어줘야 했다. 그래도 남편은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나는 석사학위를 가지고 왔는데 생활 기반은 없고 너무 많은 식구가 매달리니 생활을 꾸려나갈 수가 없었다. 먼저 십일조를 떼고 시부모 생활비, 우리가 살 최소한의 연탄과 쌀을 사면 그게 전부였다. 친정어머니가 보다 못해 간장 된장을 담가주고 이따금 밑반찬을 해 나르며 그걸로 어떻게든지 살아보라고 했다.
생계를 위해 나는 중·고생 영어 과외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국제가구점은 서울 을지로 입구에 아주 큰 점포였다. 마침 내가 그 집 아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미국 유학에서 돌아오니 신혼 시절 샀던 농은 없어져 버렸고 장롱 살 돈이 없어 벽에 못을 박고 옷을 걸 수밖에 없었다. 그 상황에서 국제가구점에 들렀더니 묵직하고 단단하게 보이는 호두나무 농이 눈에 확 들어왔다.
“이거 비싸지요?”
그러자 주인 여자는 아들의 가정교사가 물으니 배시시 웃으면서 대답했다.
“선생님이 사시면 원가에 드릴게요.”
“그게 얼만데요?”
“팔십만원만 내세요.”
집에 돌아오면서 나는 계속 중얼거렸다. 팔십만원을 어떻게 마련하지. 내겐 너무 큰 돈이었다. 울적해진 나는 옆에 놓인 한국일보를 펴들었다. 거기 팔십만원의 상금을 준다는 기사가 눈에 딱 잡혔다. 어머머! 팔십만원이면 호두나무 농을 살 수 있는 돈인데! 신문의 광고는 내일이 신춘문예 공모 마지막 날이니 내일까지 우체국 소인이 찍히면 받겠다는 광고였다.
그 순간 나는 지체 없이 남편이 쓰고 있는 흑색 원고지를 꺼내 방바닥에 펴놓고 엎드려 단편을 써 내려갔다. 내 무의식의 세계까지 각인된 미국에서 아르바이트해서 익히 잘 알고 있는 양로원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내일 아침까지라니 원고를 다시 읽어볼 시간적 여유도 없어서 마구 써낸 단편을 아침 우체국 문이 열릴 때 한국일보로 보내고 까맣게 잊어버렸다.
한 달이 지나 성탄절을 앞두고 한국일보에서 전화가 왔다. 신춘문예에 당선됐다는 전갈이었다. 나는 너무 기뻐서 수화기를 놓고 방바닥에 벌렁 누워 두 손을 머리 위로 힘차게 뻗으면서 흥분한 목소리로 크게 외쳤다.
“나 돈 벌었다. 팔십만원! 그 돈으로 호두나무 농을 사게 되었다. 신난다.”
나를 따라서 어린 두 아들도 내 곁에 나란히 누워 깔깔대고 만세를 불렀다. 남편은 그런 우리를 한심하다는 듯 내려다보면서 한마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