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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이건숙 (4) 상금이나 받고 끝날 줄 알았던 공모… ‘소설가’ 이름 달다

입력 2022-02-14 03:05:03
소설가 이건숙(왼쪽) 사모가 1986년 직행버스 앞에서 박완서 작가와 서 있다. 박 작가는 사역에 매인 이 사모가 딱하다며 종종 여행길로 이끌었다.


신문사의 면담 요청을 받고 나는 팔십만원을 받을 욕심에 들떠있었다. 혼자 가기 쑥스러워 옆에 살고 있는 선배 언니와 함께 한국일보사에 갔다. 언니랑 돈을 받아 바로 국제가구로 갈 참이었다.

그런데 으리으리하게 큰 사무실에 들어서면서 나는 잔뜩 주눅이 들었다. 문화부장 앞에 앉으니 기자들이 사진을 찍고 야단이다. 겁이 난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서 그의 주머니에서 돈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문화부장은 날카롭게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거기 좀 앉아있다 가라고 했다. 그리고는 원고 뭉치 8개를 내 앞에 턱턱 던지면서 말했다.

“800명 넘는 사람들이 응모해 끝까지 심사에 올랐던 단편들이니 여기서 다 읽어보고 가세요.”

어리어리한 표정으로 불편하게 의자에 등을 대고 앉자 언니도 내 곁에 앉았다. 첫눈에 놀란 것은 원고들 전부가 나처럼 흑색 원고지가 아니고 반짝반짝하는 흰 원고지였다. 게다가 원고지를 묶은 끈이며 치장이 아주 귀티가 나고 정성이 듬뿍 묻어났다. 안을 들치니 글씨도 얼마나 예쁘게 썼는지 오자 하나 없었다. 나는 한 번에 갈겨쓰느라고 마구 오자를 지우고 덧쓰고 야단을 했는데 이들은 정말 다이아몬드를 빚어놓은 듯 돋보였다.

“두 분이 동시 당선입니다. 한 분은 황충상이라고 김동리 소설가가 뽑았고, 당신은 최인훈 소설가가 붙들고 서로 양보를 아니 해서 시간이 걸렸습니다. 우리 측은 원고지 쓰는 것도 엉망이고 제목인 양로원도 ‘양노원’이라고 쓰니 다음 번에 기회를 주고 김동리 소설가가 뽑은 황충상으로 결정하자고 해도 최인훈 소설가가 양보하지 않았어요. 우리더러 오자(誤字)는 편집실에서 잡으면 된다고 고집을 부리니 어쩔 수 없이 신춘문예 사상에 없던 동시 당선이 나왔어요.”

이렇게 해서 나는 소설가란 이름을 달고 문단에 등장했다. 1981년도엔 신춘문예를 행하는 신문이 7개뿐이었다. 그때 당선된 사람들은 모두 이삼십 대 남자들로 나처럼 사십 대 여자가 나온 경우는 희한한 일이었다. 작가란 늦어도 20대에 발굴하는 법인데 내가 41세에 등단했으니 이상한 눈길을 던졌다.

그다음이 문제였다. 신춘문예가 이렇게 대단한지를 나는 그때까지 몰랐었다. 지금은 신문사가 늘어서 많은 신춘문예 작가들이 배출되지만 내가 등단할 당시만 해도 신춘문예 병에 걸린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10년에서 20년을 두고두고 응모하는 경우가 허다하다나. 내가 생각하듯 상금이나 받고 끝나는 일이 아니었다. 문예지에서 주관해 당선자들이 모두 모여 대담이 진행됐다. 누구한테 사사했으며 주제와 구성에 대한 질문이 쏟아지고 얼마나 문학 수행을 했느냐는 질문이 주축을 이뤘다. 사십 대 초반에 들어선 여자가 옷도 허름하게 입고 어릿거리면서 저들 틈에 끼어 앉아 어리바리했던 내 모습을 떠올리면 지금도 웃음이 난다.

연이어 여러 문예지에서 단편 청탁이 들어왔다. 제일 처음 청탁은 현대문학에서였다. 그것도 ‘쓰라면 쓰지요’ 하면서 겁 없이 ‘무거운 짐’이란 단편을 보냈다. 단편이 실리니 원고료도 두둑하게 받았다. 하지만 내가 계속 소설을 쓸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고심하기 시작했다.

정리=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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