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문예로 등단은 했지만, 그때까지 문학을 연구하고 공부한 적이 없었다. 좋아서 읽은 문학 작품들 말고는 전문적 훈련을 받지 않았다. 대학 시절 독문학을 했다지만 원문으로 독일 소설을 읽느라고 사전을 끼고 살았던 기억뿐이다.
그런 나를 하나님은 우선 소설가로 세워놓고 앞을 막고 있는 난관을 돌파하도록 몰아가셨다. 고된 훈련 기간이었다. 네 단계의 문을 통과하면서 하나님이 나를 소설가로 세우기 위해 나와 동행하고 있다는 확신을 하게 됐다.
첫 단계는 주위에서 내가 소설 쓰는 걸 모두 반대하는 분위기였다. 그걸 해결한 것은 내 고등학교 은사 이상보 교수로 나의 교복 시절 국어 선생님이셨다. 그분은 문단에서 알려진 수필가로 남편 신성종 목사가 당시 속했던 대학에서 함께 교편을 잡고 있었다. 그 은사님이 우리 부부를 식사에 초대하고 나의 소설가 활동을 부정적으로 말하는 남편을 질타했다.
‘아무나 신춘문예에 당선되는 것이 아니다. 이건 고등고시 합격보다 더 어려운 관문을 통과한 것이다. 재능 있는 사람을 얼마나 가둬놨으면 나이 마흔이 넘어 등단했겠느냐’ 하면서 나의 스승님은 일장 연설을 하셨다.
집에 돌아오면서 남편은 “당신 하고 싶으면 글을 써 보라”고 허락했다. 그러나 내심 글을 쓸 수 없을 것이라고 믿는 눈치였다.
하긴 그 시절 여자가 소설을 쓴다면 술 담배를 하고 생활이 난잡하다는 선입관을 지니고 있던 시절이라 성도들, 특히 장로님들의 눈치가 차가웠다.
두 번째 문은 이제는 고인이 된 윤남경 소설가와 만남이었다. 윤 권사님은 신문에 실린 당선 소감을 읽어보고는 크리스천이 분명하니 만나자고 했다.
나는 수화기에 대고 이렇게 답했다.
“윤남경이 누구세요? 뭐 하는 분이세요?”
나의 그런 응답에 놀란 그분은 잠시 침묵했다. 70년대를 주름잡던 단편 작가 윤남경을 모르다니. 이 사람이 정말 소설을 쓰는 사람인가 생각했던 모양이다.
“아무튼, 만납시다. 꼭 할 말이 있어요.”
부자들이 사는 별장 같은 서울 종로구 평창동 집에 그분은 살고 있었다. 윤 권사님을 만난 자리에서 나는 이렇게 따지고 들었다.
“성경에 모든 것이 있는데 나더러 무슨 글을 쓰라고 그러세요. 저는 상금이 필요해서 신춘문예에 단편을 냈을 뿐이에요.”
나의 태도에 놀란 그녀는 이렇게 물어왔다.
“사사한 선생도 없었다면 도대체 써놓은 단편이 몇 편이요?”
“하나도 없어요.”
윤남경 소설가는 황당해서 입을 딱 벌리고 머뭇거렸다. 한참 눈을 감고 깊은 기도를 한 뒤에 조용하고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하나님이 이 시대에 필요해서 당신을 강제로 끌어냈군요. 성경을 쉽게 풀어쓰는 역할을 하라고 소설가로 내세우셨네요.”
그리곤 몰아가기 시작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소설 작법을 공부하자고 했다. 자신은 오영수 소설가에게 몇 년간 사사해서 작가가 되었다고 그분 책들을 여러 권 내주면서 정독하고 매주 단편을 써서 오라고 했다. 해서 매주 단편을 써가지고 드나들면서 하나님의 문화를 확장하는 글을 써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