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풀어가는 세 번째 단계는 ‘문맥’ 동인 결성이었다. 40대에 소설을 쓰기 시작한 늦깎이들의 모임이었다. 정건영 김용철 신상성 류순하 등 전부 남자였고 나 혼자만 여자였다. 모두 국문학을 전공한 선생님들로 지금은 소설가로 잘 알려진 분들이다. 매달 단편을 써서 각자의 작품을 놓고 토론하고 각 가정을 돌면서 모이기도 했다. 얼마나 작품 비평이 거셌는지 어떤 때는 화가 치밀어 힘들었으나 나로서는 배우는 것이 참 많았다.
저들은 내 생활이 한쪽으로 너무 치우쳐 있다며 인사동에 모였을 적에는 주점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주점 안을 한 바퀴 빙 돌면서 구경시키고 나오며 이런 데도 알아야 글을 쓴다고 킥킥거리면서 훈시를 늘어놨다. 그뿐인가. 모임에서 어쩌다 돌아가면서 유행가를 부르는데 내 차례가 오니 난감했다. 교회 울타리에 갇혀 지낸 나는 한 곡도 아는 유행가가 없어서 강하게 도리질을 했다. 저들이 찬송가라도 부르라고 강요해서 내가 좋아하는 493장 ‘하늘가는 밝은 길이’를 불렀더니 일부는 허밍으로 따라 하면서 배꼽을 잡고 웃어댔다.
그래도 배울 욕심에 나는 악착같이 모임에 나가 앉아 모래처럼 저들의 가르침을 흡입했다. 본격적인 문학 훈련이었다. 게다가 저들은 문학과 거리가 먼 나를 위해 단편을 쓰면 꼼꼼하게 봐주고 평하고는 문예지에 다리를 놔주는 역할도 했다. 지면이 귀했던 시절이라 문예지가 친정이 아니면 신춘문예 출신들은 공중에 내던져진 신세여서 자생해야만 하는 시절이었다. 소설문학 한국문학 문학사상 등 여러 문예지에 길을 터주었다. 되돌아보면 문맥 동인들은 내게 소설을 보고 쓰는 눈을 길러주었다.
네 번째 단계는 내가 등단한 때부터 기독교계 잡지들이 쏟아져 나와 지면이 풍성했다. 목사들의 월간지로 유명한 월간목회엔 매달 수필 연재를 10년 가까이 한 걸로 기억된다. 남자들만 읽었던 월간목회에 내 글이 실리면서 목사의 아내들이 읽기 시작했다. 갑자기 여성 독자층이 많아져서 잡지 부수가 늘어났다는 행복한 비명도 들었다. 내가 끼친 영향은 목사와 성도의 뒤에 꼭꼭 숨어있던 목사의 아내들을 밖으로 끌어내서 많은 수가 글을 쓰겠다고 펜을 들었다는 사실이다. 남편이 대전에서 목회할 당시엔 월간목회에 사모의 핸드북이 실리고 있었다. 목사의 아내들이 대전에서 일부러 기차에서 내려 나를 보고 가려고 기웃거리기도 했다. 심지어 유성온천에 단체로 모여 목욕을 하면서 나를 밤에 불러내 목회와 문학에 관해 토론을 하면서 온밤을 보내기도 했다.
사모 핸드북인 ‘사모가 선 자리는 아름답다’는 사모들과 신학생들에게 길잡이가 됐다. 지금은 ‘사모의 품격’(두란노)이란 제목으로 수정 보완해 출판했다. ‘꼴찌의 간증’ ‘이런 때 사모는 어떻게 말할까’ ‘이런 때 성도는 어떻게 말할까’ 등이 월간목회 연재를 통해 출간됐다. 국민일보와 신앙계 등 많은 매체가 콩트나 짧은 소설을 청탁해와 전부 쓰느라 정신이 없었다. 주로 수필이기는 했지만 10년 동안 하나님은 설익은 나를 강권적으로 기초적 글쓰기 훈련을 시키셨다. 의사로 말하면 인턴과 레지던트 훈련을 거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