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학교도서실 책들을 조금이라도 자투리 시간이 나면 열심히 읽었다. 비 오는 날이나 험한 날씨엔 교실에서 체육 수업을 했다. 정말 재미없었다. 그런 날은 소설을 책상 밑에서 감추고 읽곤 했었다. 한번은 심훈의 ‘상록수’ 끝부분을 읽다가 도저히 참을 수 없어 흐느끼고 말았다. 당황한 체육 선생님은 어디가 아프냐고 다가왔고 내가 소설을 읽다가 우는 것을 안 급우들은 배가 아파 운다고 합창해서 양호실로 쫓겨나 아픈 척 몇 시간을 누워 있던 적도 있었다.
눈코 뜰 새 없이 쫓기는 생활이라 수업시간에는 남들보다 더 집중해 수업을 들어 배운 것이 머리에 거의 녹아 들어가야 했다. 어머니 말씀대로 공부하는 길이 나와 내 가족이 사는 길이란 말에 나는 온전히 배우고 책을 읽는 일에 전념했다. 도서실 책들을 서가에서 차례차례 빌려다 몽땅 읽어버릴 정도였다. 어려서부터 집안에 책이 넘쳐나고 책 속에 묻혀 살아온 습관이 어려운 환경에서도 위로와 힘이 됐다.
전쟁 직후라 유명한 분들이 정신여학교에 오셨다. 소설가 최정희, 시인 박목월 선생이 국어 시간을 담당하기도 했다. 내가 소설가가 된 뒤 모교에 들려 제일 먼저 도서실에 갔더니 빛바랜 교지에서 내가 그때 써낸 글들을 찾을 수가 있었다. ‘지심(地心)으로 돌아앉았다’ 라고 무덤을 표현한 시를 읽으면서 그 시절 상당히 예민했구나 하고 감탄했다. 또 단편이 실린 교지를 보고 ‘어머! 십대에 이미 단편을 썼구나!’하는 놀라움으로 입을 딱 벌렸다. 이건 까맣게 잊고 있던 일이다.
제복 시절 가장 특이한 일은 매일 일기를 써야 했다. 고등학교 3년간 도덕을 담당한 김필례 교장 선생님은 매주 일기장을 모아가서 빨간 볼펜으로 오자도 고쳐주고 성경 말씀이나 신앙에 관한 글을 꼭 쓰도록 장려했다. 교장 선생님이 들어오는 요일에는 급우들이 모두 일찍 등교해 일제히 일기 대신 주기(週記)를 쓰느라고 바빴다. 똑같은 볼펜으로 쓰면 들킬 것이 걱정돼 서로 볼펜을 바꿔가면서 주기를 써서 제출하느라고 모두 진땀을 흘렸다. 아무튼 일기를 쓰든 6일 치의 주기를 쓰든 3년간 그런 훈련을 받고 보니 글을 쓸 수 있는 기능을 익힌 결과를 낳았다. 되돌아보면 내가 하룻밤에 단편을 써낼 수 있었던 것은 이미 그 시절에 훈련을 받은 탓이고 그렇게라도 쓴 글이 성경과 내 삶을 연결하는 문학적 기초를 닦았다.
고3 마지막 도덕 시간에 교장 선생님은 이런 질문을 던졌다.
“너희들은 내가 행복하다고 생각하느냐?”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공부했고 학교에 드나드는 미국 선교사들과 자유로이 영어로 대화를 나누는 교장 선생님은 우리 모두의 롤모델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입을 모아 그렇다고 외쳤다. 우리 앞에 한참 침묵하시던 선생님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여자란 가정으로 돌아가야 한다. 너희들은 나처럼 되는 것보다는 가정으로 돌아가서 가정의 제사장들이 되어라.”
그 말이 씨가 되어 정신여학교 출신들은 대부분 가정에 충실하고 교회에 충성하는 장로 부인이나 목사의 아내들을 많이 배출했다. 다른 학교 출신에 비해 이혼율이 낮아 연구 대상이 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