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사당동 총신대는 ‘헐떡고개’라고 부를 정도로 가파른 곳에 있었다. 아스팔트가 깔리지 않은 진흙 길이라 비라도 오는 날이면 구두끈만 남겨놓고 온통 진흙으로 뒤범벅이 될 정도였다. 누가 보면 간첩이 산야를 헤맨 것 같다고 의심할 지경이었다.
쌀을 봉지로 사 나르면서 주로 밑반찬으로 살아가야 했다. 시누이와 남편 신성종 전도사의 등록금을 내고 살자니 무조건 아껴야 했다. 고추를 소금에 삭혀 잘게 썰어 먹고, 꼴뚜기를 상자째 사다가 소금에 삭혀 그걸 한두 개씩 다져서 고춧가루에 묻혀 먹는 것이 주식이었다. 단칸방 셋방살이는 문간방이라 쪽마루 밑 연탄아궁이에 밥도 하고 국도 끓이고 더운물도 데워 써야 했다. 남편의 급우들은 점심 도시락을 못 싸 올 정도로 어려웠고 식당에서 파는 멀건 콩나물국에 밥을 사 먹을 돈이 없어 굶는 학생들이 허다했다. 남편의 사촌 여동생 남편도 그때 함께 공부했는데 도시락을 쌀 수 없어 아내가 메뚜기를 잡아서 볶아 가루를 내주면 그걸 한두 수저씩 먹으며 허기를 채웠다. 새벽에 일어나 도시락을 싸주고 학교로 출퇴근하는 나는 거의 죽을 지경으로 지쳐가고 있었다. 그래도 남편은 내가 싸주는, 열악하지만 굶지 않을 정도의 도시락을 매일 지참할 수 있었다.
하필 그때 임신했다. 내 옆에 앉은 가정과목 선생님은 나보다 두 살 많았는데 내가 임신 상태로 너무 못 먹어 영양 상태가 좋지 않다면서 가사 실습을 하고 남은 음식을 몰래 식당 구석에 감춰놓고 메모를 남겼다. 비는 시간에 내려가서 먹으라고. 그래도 너무 고단한 생활과 영양 부족으로 2.2㎏의 작은 아이를 출산했다. 아이를 그런 험악한 셋방살이에서 낳을 거냐고 오빠의 걱정은 화풀이가 되어 돌아왔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고학년 가정교사를 해서 서울 정릉동 산꼭대기에 13평짜리 연탄 아파트를 분양받고 월부를 넣으면서 거기서 아이를 낳았다.
아기를 낳고 병원비가 부족해 하루도 머물지 못하고 퇴원한 나를 찾아온 친정어머니는 오빠 몰래 도우미를 데려다주었다. 이런 상황에 시어머니는 도우미를 보고는 놀라서 미역국이라도 끓여주는 것이 아니라 야단을 쳤다.
“나는 아이를 낳고 금방 일어나서 밭일했고 물을 길어다 밥을 해서 대가족 식사를 준비했다. 너는 이렇게 편안하게 누워서 일하는 사람까지 부리면 이상하다.”
시어머니는 그날로 도우미를 시집간 둘째 시누이 집으로 데려가 버렸다. 서울대 나온 며느리를 보았다고 충청도 산골 신씨 집성촌 사람들이 모두 시어머니 주위에 둘러앉아 울음바다였다고 한다. 대학 나온 며느리가 밥 한 끼를 차려주겠느냐고 불쌍하다고 그렇게 울었다나. 해서 다홍치마 시절부터 길을 들인다고 도우미를 데려간 모양이다.
고등학교 여교장이 내가 아기를 낳고 누워있으니 정릉 산꼭대기까지 방문했다. 학교와 집 거리가 너무 멀고, 산 높이 자리 잡은 아파트에 오르고는 힘이 들었는지 신학교에서 돌아온 신 전도사를 앞에 놓고 마구 호통을 쳤다.
“나도 목사의 아내지만 이거 너무 한다. 이렇게 하고 어떻게 목회자가 된다고 신학교를 다닐 수 있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