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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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이건숙 (25) 돈 욕심에 “우리 한국 가지 말고 장사나 해요”

입력 2022-03-15 03:05:04
소설가 이건숙 사모가 1989년 대전중앙교회에서 목회하던 남편 신성종 목사와 나란히 서 있다.


우리 부부가 가발가게를 시작한 2년간은 초창기 개척 시기라 호황이었다. 남편 신성종 목사는 돈이 들어오니 오로지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좋은 타자기도 사고 책도 마음대로 사서 공부하는 속도가 빨라 급 스피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가발가게를 하는 동안 내겐 엄청난 유혹이 다가왔다. 세상에! 돈이 술술 들어오니 돈으로 무엇이나 할 수 있었다.

“여보! 우리 교수니 목사니 신학자니 다 팽개치고 장사를 합시다. 돈이 이렇게 술술 들어오는데 뭣 하려고 그 고생을 해요. 영주권을 신청하고 다운타운 좋은 곳에 큰 가게를 차리고 돈을 왕창 벌어요. 목사보다 장로가 되어서 헌신하면 되잖아요.”

이렇게 돈독에 빠진 나를 남편은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단호한 어조로 강하게 말했다.

“나 오늘 모교 교수로 청빙 받았어. 내가 아이들 데리고 귀국할 터이니 당신은 가게를 정리하고 학업 마치고 바로 귀국해.”

“난 안 갈 거야. 여기서 돈 벌 거야. 세상에! 이 좋은 돈!”

“우리 두 사람 공부 끝나면 하나님께서 바로 걷어간다고 했어. 내가 기도 응답 그렇게 받았으니 빨리 가게를 정리하라고.”

그는 바로 아이들을 데리고 귀국 준비를 하고 내가 다니는 대학 근처에 방 하나를 얻어주면서 자동차는 바로 팔아버려 내 발을 묶어버렸다. 겁이 많았던 나는 운전대를 잡지 못하게 해서 운전을 못 하니 꼼짝할 수가 없었다. 가발가게를 정리한 돈은 남편과 아이들의 귀국 비행기 표와 책을 부치는 데 쓰고 나의 일 년 학비와 식비를 남겨둔 채 말이다. 필라델피아 남쪽은 위험한 곳으로 두어 번 권총 강도를 당했으나 함께 일하던 흑인 여자의 기지로 살아났다. 하나님은 딱 우리 부부가 공부할 만큼만 물질을 주셨다.

백인들 틈에서 그들 음식만 먹으면서 일 년을 사는 것은 참으로 힘들었다. 아무튼 정상으로는 1년 반이 걸릴 코스를 집중해 1년 안에 다 마치고 다행히 단번에 졸업시험에 통과해 곧바로 귀국했다.

돌아와 보니 아이들도 남편도 엉망이었다. 우리의 도움을 받은 신학생이 이상한 편지를 보내놔서 신학교에서 교편을 잡을 수가 없었다. 소속된 교회가 이북파이고 신학교는 경상도파라 그렇다고 했다. 친정어머니 혼자 사는 집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들어가서 남편은 전도사 생활비를 받으며 고생하고 있었다.

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해 충현교회에서 존경하는 K목사에게 목사 안수를 받을 정도로 그는 원로목사를 사랑했다. 그분의 첫 번째 세례자이고 결혼 주례와 목사 안수까지 같은 목사에게 받았으니 남편의 일생을 함께한 교회와 목사였다. 그러나 단 한 번의 학비 도움도 비행기표 도움도 받은 일이 없었다. 내가 미국에서 돌아온다고 얻어준 교회의 사택은 살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청계천 고가도로와 나란히 자리 잡은 상가아파트여서 소음과 먼지로 공기가 탁했다. 빨래해서 베란다에 널면 고가도로를 달리는 차량이 뿌리는 먼지로 새까맣게 되어 문을 닫고 살아야 할 정도였다. 학위를 받고 귀국하면 모든 고난이 끝나는 것으로 알았던 나는 낙망하여 쓰러져 고려병원에 2개월간 입원했다.

정리=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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