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시인이자 사상가 랠프 월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1803∼1882·아래 사진)은 다양한 얼굴로 후대에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그는 영국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초기 미국인들에게 정신적 독립을 선언한 ‘정신적 스승’이었고, 노예제 폐지 등 당시 예민한 사회문제에 적극적으로 발언해 온 ‘개혁가’였다. 또 그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 너새니얼 호손, 토머스 칼라일 등 당대 문인들과 영적 교감을 나누며 내부의 정신적 자아가 외부의 물질적 존재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당대의 초월주의 모임을 이끌어간 ‘문학가’였다.
신앙의 힘, 자기 신뢰
19세기 미국은 정치적으로는 독립했지만, 문화와 사상적으로는 영국이나 유럽에 종속돼 있었고 새로운 출발을 위해서는 국가 정신이 필요했다. 에머슨은 30대 중반부터 시작한 40년간의 강연으로 미국이 강대국으로 도약하려면 유럽으로부터 사상적으로 독립할 것과 미국인만의 길을 가야 한다고 줄곧 주장했다.
그의 사상 밑바탕엔 개인의 자기 신뢰를 중시하고, 자연 속에 존재하는 영적인 실재를 믿으며 자기 내면의 신성을 느끼고 하나님과 소통해야 한다는 의식이 흐른다. 에머슨은 강연과 작품을 통해 시종일관 이렇게 말한다. “내 안에 확고한 신념과 자기 자신을 믿는 신뢰만 있다면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 앞으로 나갈 수 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이루어진 자기 자신을 믿어야 한다.” “인간은 자신 속에서 신이 말하고 있음을 깨닫게 될 때 비로소 자신을 신뢰하게 된다.” 이는 미국의 중요한 정신적인 뿌리가 됐다.
그는 1941년 발표한 에세이 ‘자기 신뢰’에서 “마차에 별을 묶어 두라”고 말했다. 현재에 머물지 말고 높은 꿈을 갖고 나가란 의미이다. 그가 말하는 꿈은 ‘세상의 중심에 홀로 서서 자기 자신을 신뢰하고 긍정하며 스스로 돕는 자를 도우시는 하나님을 지향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을 믿는 것은 자신의 교만과 오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삶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자신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의 배후에는 기존의 청교도 신앙이 너무 하나님에 의존함으로써 자신의 존재감이나 자신감을 상실할 뿐만 아니라 주어진 삶에 대한 해이와 삶의 개척에 대한 무감각에서 헤어나지 못했다는 자의식이 깔려 있다. 에머슨에 의하면 신앙이란 자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스스로가 원하는 자신만의 일을 부여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경청하는 행위다. 그렇게 ‘나’에게 집중할 때 우리는 좀 더 성장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으며, 인생의 성공이 자신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신앙의 진정한 힘은 자기 자신을 신뢰하고 긍정하는 데 있다고 봤다.
그의 사상을 관통하는 또 하나의 핵심요소가 있다. 자연관이다. 영혼과 자연의 조화로운 관계를 통해 운명의 이치를 깨닫고 더 나아가 물질주의에 갇혀 있는 정신을 회복시키자는 것이 그의 일관된 주제이다. 그의 자연관은 1836년 발표된 에세이 ‘자연론’에 잘 드러난다. ‘자연론’은 인간의 죄의 속성을 주장한 칼뱅 사상에 반기를 들고 인간의 신성함을 일깨워준 새로운 견해였다. 인간의 영혼이 개인을 초월해 자연의 일부가 되고 신의 일부가 된다는 사상이다.
그는 먼저 우주는 자연과 영혼으로 구성돼 있고, 자연은 내가 아닌 모든 것을 가리킨다고 규정한다. 이어 자연은 새로운 삶을 가르치는 훈련장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자연과 친밀한 관계이며, 자연은 인간이 느끼는 질문에 모두 대답해줄 수 있다. 그래서 자연은 시적인 마음으로 관찰할 필요가 있는데 그런 심적 상태를 가리켜 에머슨은 ‘투명한 눈알’이라고 비유적으로 말했다. 그 투명한 눈알로 자연을 살펴볼 때 초월적 진리를 깨닫는다는 것이다.
“숲속에서 우리는 이성과 신앙으로 돌아간다. 내 인생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그게 불명예든 재앙이든 자연이 고치지 못하는 것은 없다. …나는 하나의 투명한 눈알이 된다. 나는 이것도 저것도 그 어떤 것도 아닌 무의 존재가 된다. 우주적 존재의 흐름이 나를 관통해 순환한다. 나는 하나님의 한 부분이 된다. 나는 오염되지 않은 불멸의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사람이 된다.”(‘자연’ 중)
목회자에서 사상가로
에머슨은 수 대에 걸쳐 목사를 배출한 청교도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1829년에 하버드대학을 졸업함과 동시에 부친이 담임했던 유서 깊은 보스턴의 제2교회에 부목사로 부임했다. 하지만 목사로서의 삶은 오래가지 않았다. 3년 후 더 이상 형식적인 성찬 예식을 집전할 수 없다는 고별설교를 하고 목사직을 사임한다. 당시 목사직이 의미하는 사회적 명예와 경제적 안정성을 생각해 볼 때 목사직 사직은 ‘사건’이었다.
무엇이 그를 목회자의 길을 떠나게 했을까. 그는 성경이 과거에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 쓰인 ‘닫혀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돼서는 안 되며, 현재도 쓰이고 있는 ‘열린 책’이 돼야 한다고 평소 주장했다. 또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종교를 형식화에서 구원했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형식화시키는 오류를 범했다고 생각했다. 기독교 교리의 독선화와 신앙의 형식화에 깊은 회의를 느껴 1832년 목사직을 사임한 것이다. 그러나 그 배경엔 아무래도 결혼 후 2년 만에 죽은 아내의 영향이 컸던 것 같다. 그가 목사직 사직을 결심한 것은 아내의 죽음 직후였다. 그는 한동안 매일 아내의 묘지를 찾을 정도로 아내를 잊지 못했다. 아내의 죽음은 그를 깊은 슬픔과 신앙의 회의로 몰아갔다. 어쩌면 이 고통이 그를 목회자에서 철학자로 다시 태어나게 했는지도 모른다.
에머슨은 고통과 혼란의 시간을, 여행을 통해 추스렸다. 이탈리아를 거쳐 영국을 여행한 후 1834년 귀국했다. 그 기간 동안 인간과 자연 사이에는 영적 교류가 있을 수 있다는 신념을 확고히 했다. 귀국 후 ‘자연’이라는 긴 수상문을 쓰기 시작했고 영향력 있는 강연가로 명성을 얻었다. 비록 에머슨이 목회자의 길을 포기하긴 했어도 설교자로서 길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이듬해 린다 잭슨과 재혼하고 당대의 지식인들과 교제하면서 사상가로 다시 태어난다. 그의 나이 32세였다.
그의 강연 중 미국 문화사에 기념비적으로 꼽히는 것은 1837년 미국 하버드대학에서의 강연이었다. ‘미국의 학자’란 주제의 연설에서 그는 전통과 과거의 영향을 공격했으며 미국적 창조력을 새롭게 분출할 것을 주장했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유럽의 우아한 사상을 경청해왔다…. 의존의 기대, 즉 다른 나라의 학문에 대한 오랜 도제시대는 이제 끝나가고 있다.” 영국의 문화와 사상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미국인의 모습과 사상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는 의미였다. 이어 1838년 하버드대 신학대학 4학년생들 앞에서 한 ‘신학대학에서의 연설’은 당대 종교의 형식주의와 전통을 정면으로 공격해 보스턴과 케임브리지의 보수적인 종교인들에게 심한 반발을 샀다. 이로 이해 그는 거의 30년이 지난 후에야 다시 하버드대학에서 강연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국 문화의 정신적 기둥을 세운 에머슨이 없었다면 진정한 의미의 미국 문학은 탄생할 수 없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는 미국 문학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작품은 자기 성찰의 힘이 강했으며, 불안과 두려움으로 흔들리는 영혼들에 삶의 방향을 제시했다. 그가 제시한 ‘자기 신뢰’와 ‘민권’의 개념은 지금도 미국 시민들의 의식 속에 깊이 뿌리 박혀있다. 대표 저서로 ‘자연’ ‘위인이란 무엇인가’ ‘인생의 처세’ ‘대표적 인간’ ‘사회와 고독’ 등이 있다.
이지현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jeeh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