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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명성황후, 기독교 중심의 새로운 나라 그려

입력 2022-05-05 03:05:02
철종의 사위이며 갑신정변 주역의 한 사람으로 갑오개혁의 중심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박영효.
 
미국인으로서 청일전쟁 당시 조선 군사 교관이었던 윌리엄 M 다이 장군.
 
언더우드 선교사의 부인으로 명성황후의 시의였던 릴리어스 호튼 언더우드.
 
캐나다 선교사이자 세브란스병원의 창립자로 한국 근대의학에 크게 이바지한 올리버 에비슨.
 
미국 감리교 감독으로 1895년 1월 조선을 방문해 고종과 박영효를 만난 윌리엄 닌데.




1894년 청일전쟁은 동북아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이 전쟁에서 일본이 청을 이김으로써 오랫동안 동북아를 지배했던 중국 중심의 중화 질서는 무너져 버렸고, 조선은 공식적으로 중국의 속방에서 벗어나게 됐다. 이것은 오랫동안 중국의 속방으로 살아온 조선에 새로운 시대가 열렸음을 말한다. 조선 앞에 놓인 과제는 앞으로 어떤 세상을 만들 것인가였다.

당시 가장 강력하게 떠오른 것은 일본 중심의 새로운 질서였다. 일본은 청을 이겼고 일본은 자신들이 주도해 조선을 자신의 영향 아래 두고자 했다. 하지만 조선은 본능적으로 일본을 싫어했다. 고종과 명성황후는 미국과 기독교를 중심으로 나라를 새롭게 만들어 보려고 했다. 비록 이런 생각이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우리는 당시 고종의 생각을 알 수 있다.

우선 지적하고 싶은 것은 고종은 미국과 기독교를 호의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고종은 1880년 황준헌이 쓴 ‘조선책략’을 읽고 미국은 땅이 넓어 영토적인 욕심이 없고, 미국의 기독교는 천주교와 달리 남의 나라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다. 1894년 여름 청일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고종은 그의 경호를 미국인 윌리엄 M 다이 장군에게 맡겼다. 당시 고종의 주치의가 에비슨이었고 명성황후의 주치의는 언더우드 부인이었다. 선교사들은 고종과 개인적으로 매우 가까웠다. 고종은 선교사들이 거주하는 정동의 경운궁(현 덕수궁)을 수리하고 이곳으로 이사하려고 했다. 위기 시 미국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고자 했다.

1894년 7월 청일전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갑오개혁이 시작되자 일본은 갑신정변에 참여했던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같은 개화파 인물들을 초청했다. 이들은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일본으로 도망갔고, 다음에 미국으로 가서 기독교를 배우고 서구 문명도 익혔다. 이들은 모두 독실한 기독교인은 아니었지만 기독교를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반역자로 낙인찍혔던 이들은 고종으로부터 사면을 받아, 박영효는 1894년 말 내무대신이 됐고 서광범은 법무대신이 됐다. 이때 주미공사관에서 일했던 박정양 이상재 같은 친미개화파가 새 정부에 참여했고, 다음 해인 1895년에는 독실한 기독교인인 서재필과 윤치호도 귀국했다.

당시 고종과 명성황후는 선교사들에게 적극적으로 접근했다. 고종은 남자선교사들을 초청해 국제 정세를 논했고, 명성황후는 여자선교사들을 초청해 잔치를 벌였다. 선교사들은 청일전쟁 이후 조선 왕조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동정했다. 이런 가운데 1885년 1월 미국 감리교 윌리엄 닌데 감독이 조선을 방문하고 고종을 알현했다. 고종은 닌데에게 선교사들의 도움을 간절하게 요청했다. 이어서 닌데는 박영효를 만났는데 박영효는 닌데에게 “조선은 기독교 국가가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중에 ‘조선의 비극’을 쓴 매켄지에 의하면 당시 박영효는 미국의 도움을 간절히 요청했다. 박영효는 미국은 이미 조선에 좋은 일을 많이 했으며 앞으로도 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우리 백성이 필요로 하는 것은 교육과 기독교화입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개혁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전에 “우리 백성은 교육받고 기독교화돼야 합니다. 그럴 때만이 우리는 입헌 정부를 가질 수 있고, 아마도 가까운 미래에 당신의 나라와 같이 자유롭고 개화된 나라를 갖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기독교가 새로운 나라의 기초가 돼야 한다는 것이다.

조선 정부의 계획은 구체적이었다. 이미 갑오개혁의 하나로 일본식 개혁이 시도되고 있었다. 이를 염려한 박영효는 명성황후에게 미국식 교육 개혁을 제안했다. 명성황후는 이런 미국식 개혁을 지지했고 그 비용을 담당하기로 약속했다. 언더우드와 애비슨은 이런 조선 정부의 제안을 미국 선교부에 알리고 적극적으로 도왔다. 하지만 여기에 대한 미국 정부의 반응은 냉랭했다. 조선은 미국의 도움을 간절히 원했지만 미국은 조선 문제에 개입하는 것을 극도로 조심했다. 박영효는 기독교를 국교로 하자고 제안했지만, 선교사들은 미국의 정교분리 원칙을 내세워 이를 거부했다.

청일전쟁 이후 러시아가 새롭게 등장했다. 일본에 패배한 중국은 1885년 4월 시모노세키조약을 통해 조선의 독립을 인정하고, 대만과 요동반도를 일본에 넘겨줬다. 하지만 일본의 부상을 염려한 러시아가 독일, 프랑스와 함께 일본에 압력을 넣어 요동반도를 포기하게 했다. 고종과 명성황후는 러시아가 극동에 새롭게 등장한 강자라고 생각했다. 이제 명성황후는 러시아를 의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본은 이런 명성황후를 자신들의 개혁에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하고, 1895년 10월 자객을 보내 살해했다.

청일전쟁 이후 조선은 중화 질서에서 벗어나 미국과 기독교를 중심으로 하는 서구 근대문명에 진입하려고 했다. 여기에 대해서 선교사들은 조선을 도와주려 했지만, 정작 미국 정부는 여기에 냉담했고 확고한 신념을 갖지 못한 고종은 러시아를 의존했다. 결국 조선은 서구 근대문명과 손잡지 못하고 전근대적 러시아의 전제정치를 본받게 됐다.

박명수 서울신대 명예교수·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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