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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영성 작가] 구원의 종은 당신을 위해 오늘도 울린다

입력 2022-06-04 03:10:01
게티이미지뱅크














“사람은 누구도 혼자만의 섬이 아니다. 사람은 저마다 대륙의 한 조각이요, 본토의 일부다. 만일 흙덩이 하나가 바닷물에 씻겨 간다면 유럽은 그만큼 작아지는 것이다. 이는 곶(岬)이 쓸려 간다고 해도 마찬가지이며, 당신의 친구나 당신이 소유한 영지(領地)가 쓸려간다 해도 마찬가지다. 나는 인류 가운데 하나이니, 어느 누구의 죽음도 나를 감소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보내어 누구를 위해 종이 울리나 알려고 하지 마라. 종은 바로 그대를 위해 울리는 것이다.”

17세기 성공회 사제이자 시인이었던 존 던(1572~1631·아래 사진)의 ‘비상시를 위한 기도문’ 중 ‘묵상 17’에 수록된 ‘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의 일부 내용이다. 이 기도문은 ‘인간은 아무도 섬이 아니다’ ‘누구를 위해 종이 울리는지 알려 하지 말라’ ‘종은 그대를 위해 울리는 것이다’ 등 영문학사에 길이 남을 명문장을 낳았다. 특히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기도문에 나오는 한 구절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소설 제목으로 발표하면서 기도문은 더욱 많이 알려졌다.
 
성공회로 개종

이 기도문을 쓴 존 던은 영문학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이다. 그는 대표적 형이상학파 시인으로 셰익스피어와 밀턴 사이에 활동한 가장 영향력 있는 시인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유서 깊은 로마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났다. 모친은 유명한 극작가 존 헤이우드의 딸이었으며 교회에 대한 국왕의 수위권에 반대하다 처형된 ‘유토피아’의 저자 토머스 모어 경의 후손이다. 이런 가문의 신앙은 그에게 많은 고통을 안겨 주었다. 당시 영국은 반가톨릭 정서가 극에 달해있었고 가톨릭교도들은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비밀경찰에 의해 감시받고 통제되던 시기였다. 그는 가톨릭 신자였으므로 대학에서 학위를 받는 것은 고사하고 공직에 진출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는 ‘가톨릭 신앙을 고수함으로 겪게 될 시련을 감내할 것인가, 아니면 국교인 성공회로 개종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괴로운 일이었지만 후자를 택해 1590년 성공회로 개종했다. 그는 1615년에 성공회 성직자가 됐고 1621년 세인트 폴 대성당의 수석 사제로 임명됐다.

그가 세인트 폴 대성당 수석 사제로 지내는 동안 대역병의 물결이 런던을 세 번이나 휩쓸었다. 런던시에는 매일 장례 종소리가 울렸고 인구는 격감했다. 그에게도 병증이 시작됐다. 페스트 병증이었다. 이때 그가 병상에서 쓴 기도문이 ‘비상시를 위한 기도문’이다. 1623년 11월 후반부터 12월 초까지 육체적 고통에 따른 그의 영적 반응에 근거해 기도문을 썼다. 본문은 총 23장으로 각 장은 ‘묵상’ ‘논의’ ‘기도’로 구성됐다. 병자가 병의 단계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당대 가장 유명한 설교가로 인정받았던 존 던 만큼 죽음을 가까이 느끼며 성찰한 작가는 드문 듯하다. 그가 남긴 시 51편 중 32편의 중심 주제가 죽음이다. 그는 죽음을 ‘삶이란 질병’을 다스리는 유일한 치료제로 생각했다.
 
인류는 한 권의 책

역병이 창궐하던 17세기 런던, 사람이 죽으면 조종(弔鐘)을 울렸고 사람들은 그것이 누구의 죽음을 알리는 소리인지 궁금해했다. 그리고 잠시 일손을 멈추고 죽은 자를 위해 기도했다. 존 던은 기도문에서 그것이 누구를 위해 울리는 종소리인지 궁금해하지 말라고 말한다. 그것은 바로 나를 위한 종소리, 내 죽음의 조종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종소리가 지향하는 그 사람은 너무나 병이 깊어 종이 자신을 위해 울리고 있다는 것도 모를 것이다. 그리고 비록 나는 자신을 실제보다 훨씬 더 괜찮다고 생각하지만, 나의 상태를 아는 가까운 이들이 나를 위해 종을 울리게 했는데 나만이 그것을 모르고 있을 수도 있다.”

던은 이 기도문을 통해 알지 못하는 사람에 대해 동류의식을 느끼며, 자기에 대한 생각에서 이웃에 대한 생각으로 사유를 확장했다. “모든 인류는 한 저자에 의해 쓰인 한 권의 책이며, 한 사람이 죽는 것은 책에서 한 장이 찢겨나가는 게 아니라 더 훌륭한 언어로 번역되는 것이니… 그분의 손은 우리의 흩어진 낱장들을 다시 한데 묶어, 모든 책이 서로에게 열려져 놓일 도서관에 비치할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설교자만이 아니고 회중도 부르듯이 이 종소리는 우리 모두를 부르고 있다.”

그의 작가로서의 경력은 영국 국교회 성직을 맡기 전과 후로 나누어진다. 성직자의 길을 걷게 되면서 던의 작품은 종교시와 묵상, 설교 등의 산문이 주류를 이룬다. 당시 시인들이 주로 연애 시를 쓰기 위해 소네트 형식을 사용했던 것과 대조적으로 그는 신앙적 성찰을 담은 19편의 소네트를 썼다. ‘거룩한 소네트’란 연작으로 소개됐다. 소네트들은 대체로 죄 죽음 구원과 같은 무거운 신앙적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피할 수 없는 죽음에 직면한 자신의 실존적 상황 앞에 두려워 떨며 신의 은총과 자비를 구하는 던의 내면적 고뇌를 읽을 수 있다.

“죽음아, 거만 떨지 마라…/한 번의 짧은 잠이 지나면 우리는 영원히 깨어나니/죽음은 더 이상 없으리라. 죽음아, 네가 죽을 것이다.”(‘거룩한 소네트 10번 죽음아 거만 떨지 마라’ 중)

죽은 사람은 영생을 위해 천국에 간다는 믿음이 굳건했다. “제게는 두려움의 죄가 있습니다/마지막 실을 다 짜고 나서/생의 이편에서 소멸할 거로 생각한 죄/그러나 당신 자신을 두고 맹세해 주소서/제가 죽을 때 당신의 아들께서 빛을 비추실 거라고/전에도 이제도 그러하시듯/그렇게 하신 후에야 당신은 용서하신 것이니/더 이상 제가 두려워할 것이 없겠나이다.”(‘성부 하나님에게 드리는 찬가’ 중)
 
죽음의 결투

그가 죽음을 앞두고 병상에서 쓴 시에선 평생 자신의 죄를 회개하며 새롭게 살고자 한 한 그리스도인의 심정을 느낄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이 십자가에 달려 죽지 않았다면 죄가 영원히 모든 이들을 어둡게 덮었으리라…. 저는 당신께 등을 돌리지만 그것은 매를 맞고자 돌리는 것입니다. 당신이 자비롭게 멈추실 때까지. 오 당신의 분노를 살 만하다고 생각하시어 저를 벌하시고 저의 녹스름을, 저의 기형을 불태워 없애주소서. 당신이 저를 알아볼 수 있도록 은총으로써 당신의 모상을 회복해 주시면, 제가 고개를 돌리겠습니다.”(‘1631년 성금요일, 서쪽으로 달려가며’ 중)

던은 자신이 죽기 한 달 전, ‘죽음의 결투’란 주제로 마지막 설교를 했다. 설교문에는 ‘죽어가는 생명과 살아 있으나 죽은 육체에 맞선 영혼에 하는 위로’라는 긴 부제가 붙어 있다. 당시의 증언에 따르면 설교는 감동적이었으며 부패를 경험하지 않은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와 달리 죽어서 썩고 소멸하고 부패를 겪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에 대해 생생하게 묘사했다.

“우리는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수의를 걸쳤습니다. 이 수의는 우리가 잉태된 순간부터 우리와 함께 자라나고 우리는 그 수의를 두른 채 이 세상에 나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무덤을 찾아오는 것이니까요.”

그가 마지막 설교 후 수의를 입은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게 한 일은 유명한 일화로 남는다. 존 던은 사후에 자신이 젊을 때 썼던 세속적 시들이 출판되지 않도록 주위에 신신당부했지만 죽은 지 2년 후 1633년 ‘시집’이란 이름으로 첫 시집이 출판됐다. 오늘날 그의 시와 산문들은 영국 문학에서 가장 사랑받는 작품에 속한다. 영국 성공회와 미국의 복음주의 루터교회는 매년 3월 31일을 존 던 축일로 시인이자 성직자인 그의 공적을 기리고 있다.

이지현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jeeh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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