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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써 지킨 신앙… 그날 밤 35인이 스러졌다

입력 2022-06-25 03:05:01
그래픽=이영은, 게티이미지뱅크
 
상월교회 설립자인 나옥매 전도부인의 묘(위 사진)와 6·25 전쟁 당시 담임 교역자였던 신덕철 전도사의 묘. 이들은 빨치산의 총 칼 위협에도 예수를 부인하지 않고 순교를 택했다.



 
전남 영암 상월그리스도의교회 이성배 목사가 지난 17일 참배객에게 교회 앞마당에 있는 35인 순교자 기념탑의 설립 과정과 의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살해 이유는 단지 ‘기독교인’이라는 것이었다. 전남 영암군 상월그리스도의교회는 한창 부흥하고 있었다. 성도들은 날마다 모이기에 힘쓰고 찬송과 기도, 예배를 드리며 영혼 구원에 힘을 쏟았다.

하지만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며 교회 성장은 중단됐다. 공산군에 협조하는 빨치산이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불며 성장하던 이 교회의 예배를 금지했다. 예배당 건물을 헐어 불태웠고 남은 목재를 방공호 구축에 사용했다.

그럼에도 신덕철 담임 전도사와 성도들은 사택에서 비밀리에 예배를 계속했다. 서로 격려하며 국군 수복을 기다렸다. 빨치산은 전세가 불리해지자 최후의 발악을 하며 주민을 더 괴롭혔다. 지주와 지식인, 기독교인을 학살키로 하고 명단을 작성했다.

11월 5일 어둠이 짙게 깔린 밤. 빨치산은 추수하느라 곤히 잠자는 성도를 한 사람씩 불러냈다. 잡혀 온 성도의 손을 결박했고 서로 대화하지 못하게 했다. 자정을 넘길 때쯤 “교육받으러 가야 한다”며 일렬로 세워 인근 숲으로 끌고 갔다. 외삼줄(삼나무 껍질로 모아 만든 줄)로 굴비 엮듯 손을 줄줄이 묶어 도망가지 못하도록 했다. 빨치산은 윗옷을 벗기고 미리 준비한 몽둥이와 예리한 죽창, 서슬 시퍼런 도끼와 삽, 망치, 칼 등으로 성도들을 무참하게 살해했다. 그리고 구덩이를 파고 시신을 매장했다.

사건 당시 20살 청년이던 임수삼(92)씨는 빨치산에게 가족을 잃은 그날 밤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눈앞에서 할아버지와 할머니, 어머니, 두 동생이 손이 묶인 채 학살 현장으로 끌려갔고 임씨 혼자 탈출에 성공했다. 임씨는 자신의 가족을 포함해 기독교인 35명이 희생된 ‘전남 영암군 학산면 상월그리스도의교회’ 집단 학살사건의 생존자이자 목격자이다. 당시 가족과 함께 끌려가다 간신히 줄을 풀고 피신해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현재 경기 김포시에 살고 있는 임씨는 “할아버지 임유삼(당시 60세) 집사와 할머니 김춘동(당시 61세) 집사는 처형장으로 질질 끌려가는 중에도 ‘날빛보다 더 밝은 천국 믿는 맘 가지고 가겠네’로 시작하는 찬송을 성도와 함께 부르셨다. 특히 나이 어린 자녀가 죽임 당하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끝까지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보이셨다. 빨치산은 나중에 잡혀 온 손자를 보며 애절한 눈빛으로 볼을 비비면서 이 세상 마지막 인사를 하는 할아버지를 구타하며 못하게 했다”고 증언했다.

당시 58세인 서석근(여) 집사는 순교를 위해 1주일간 금식기도를 하며 순교를 각오하고 부활의 소망을 갖도록 권면했다. 서 집사는 성도에게 “이때 죽어야 첫째 부활에 참여할 수 있다”며 마지막 순교 순간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지 않았다.

순교자 중 교회 설립자인 나옥매(당시 59세·여) 전도부인은 헌신과 복음전파 사역으로 여러 교회 설립에 공헌했다. 나 전도부인은 일제 강점기 때 목숨 걸고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4년 5개월간 옥살이를 한 신앙인이었다. 순교 당시 40세로 상월교회 담임교역자였던 신덕철 전도사도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신앙의 절개가 있었다. 복음전파에 적극적이며 성령으로 충만했다. 그는 장모, 처제와 함께 순교했다.

박석현 광주양림교회 목사는 김순임 사모, 아들 박원택과 전쟁을 피해 처가에 왔다 순교했다. 나 전도부인의 사위인 박 목사는 끌려 가면서도 나지막하게 찬송 ‘피난처 있으니’를 불렀고 처형장에서 잠깐 기도할 시간을 달라고 하고 큰소리로 기도하고 순교했다.

박 목사는 친아들 원택을 살릴 수 있었지만 그 대신 갈 곳이 없어 수양딸처럼 데리고 살던 김귀순의 생명을 살려달라고 요청했다. 박 목사는 “이 아이는 나하고 피도 물도 섞이지 않았다. 가난한 아이니까 살려 달라”고 애원했다. 또 “공산당은 가난한 사람을 위한다고 들었다. 그러니 저 불쌍한 아이를 살려 달라”고 하니 빨치산은 그 자매를 석방했다. 박 목사는 순교 직전 주머니에 있는 돈을 꺼내주며 “귀순아 돌아가다 배고프면 이 돈으로 밥 사 먹어라”고 했다. 순교자 중에는 9~12세 어린이와 뱃속의 태아도 포함돼 있다.

헤럴드 테일러 선교사가 1957년 미국 그리스도의교회협의회에 보낸 선교 보고서와 선교지 ‘한국에 그리스도를’(For Christ in Korea)에 따르면 진성구 장로와 임상단 권사의 아들 3명도 목숨을 잃었다. 진 장로는 마을에 빨치산이 나타나 자신을 에워싸며 “거만하게 굴지 마라. 세상이 바뀌었다. 양키의 똥개들인 너희 그리스도인들을 말살해 버리겠다”고 위협했다. 그들의 소행은 마을에서 진을 치고 있는 공산군 지도자에게 잘 보이고 싶어 꾸민 것이 분명했다. 진 장로는 최후를 잘 맞이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 드렸다. 그러자 주님의 평안이 임했고 마음이 안정됐다.

빨치산은 진 장로를 작은 방에 가뒀다. 다음 날 인민재판에 세울 심산이었다. 그러나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진 장로는 산 중턱 동굴에 버려져 있었다. 어떻게 그곳까지 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겨우 정신을 차려 산에서 기어 내려왔고 벌목꾼에게 발견돼 정성스러운 간호를 받았다. 수일 뒤 공산군이 북으로 퇴각했고 마을은 빨치산으로부터 해방됐다.

진 장로는 가족의 안위를 걱정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자신의 세 아들은 이미 빨치산에게 살해된 후였다. 그 빨치산들은 나중에 체포됐다. 진 장로의 친구들은 총을 건네며 복수하라고 등을 떠밀었다. 진 장로의 눈에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며칠 뒤 마을 밖 언덕으로 세 사람이 끌려갔고 또 한 사람이 권총을 들고 뒤따랐다. 잠시 후 세 발의 총소리가 났다. 총소리를 들은 주민들은 보복살인이 이뤄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진 장로는 그들을 용서하고 풀어줬다. 그들은 6개월 뒤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이듬해 봄 사랑의 용서로 살아난 세 사람이 진 장로 세 아들의 무덤 앞에 꽃다발을 놓고 기도하고 가는 것이 목격됐다.

상월교회는 1993년 3월 교회 마당에 순교자 기념탑을 세워 순교정신을 기리고 있다. 2009년 3월 순교자의 기도 내용과 순교 상황을 담은 기념비를 순교 장소에 세웠다. 2019년 3월 순교자이자 교회 설립자인 나 전도부인을 교회 공동묘지인 ‘부활의 동산’에 이장했다. 2020년 8월 침례(세례)식과 세족식을 진행할 수 있도록 순교 장소를 공원화했다.

한국그리스도의교회협의회(회장 김홍철 목사)는 35인의 순교자를 낸 상월교회를 ‘한국기독교순교사적지’로 지정해 지난달 현판식을 가졌다. 상월교회는 한적하고 조용한 시골교회다. 하지만 순교의 거룩한 피를 통해 통일조국을 위한 기도의 터전, 화해와 용서의 신앙을 배우는 장소로 거듭나고 있다. 상월교회는 순교 신앙 계승을 위해 ‘순교자 영성 훈련’을 진행하고 있다. 현재까지 11기를 배출했다.

2014년 이 교회에 부임한 이성배(59)목사는 순교역사의 현장을 지키는 사명감으로 목회에 전념하고 있다. 이 목사는 “‘예수를 부인하면 살려 주겠다. 그렇지 않으면 모두 죽일 것이다’는 빨치산의 위협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신앙을 지킨 선진에게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상월교회는 주님 사랑, 교회 사랑, 천국 소망의 신앙을 확립해 나가는 순교신앙을 열방을 향해 펼쳐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교인 김병찬(72·크로바농원 대표)장로는 “전쟁의 비극과 참상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라며 “순교·믿음, 부활신앙, 오직 예수로 충만한 교회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윤정숙(59)집사는 “믿음이 약해질 때마다 순교정신을 되새긴다. 기독교 신앙을 지키다 순교한 우리 교회의 산 역사를 자녀에게 틈날 때마다 이야기하고 있다”고 말했다.

영암= 글·사진 유영대 기획위원 ydyo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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