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서의 10년, 그 기간은 나를 목사로 길렀다. 공부하고 기도하며 목회자의 길을 연습했던 여정이었던 셈이었다. 학교에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부산YMCA 활동을 했다.
YMCA를 통해 기독 청년들이 가져야 할 세계관과 믿는 사람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배웠다. 1979년 부마 민주항쟁의 열기는 뜨거웠다. 이와 같은 역사의 변곡점마다 YMCA는 기독교인이라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길을 제시했다. 신앙이 있는 또래들이 모이는 공간이기도 했다. 공부하는 틈틈이 YMCA 사무실을 드나들었다.
내심 고향 거제에도 YMCA가 세워지는 꿈을 꿨다. 그 일을 내가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지만 85년 아무것도 없이 거제로 돌아온 뒤 드디어 YMCA를 고향에 이식할 기회가 생겼다.
이듬해부터 초대장을 만들어 돌렸다. 사실 나를 알릴 명함과도 같은 쪽지였다. ‘청년 모임 안내’라는 제목 아래 ‘거제YMCA 창립을 위한 기도회’라고 행사명을 적었다. 기도회는 매주 화요일 저녁 8시 옥포 정비공장 옆 작은 사무실에서 열렸다. 맨 아래에는 임시 연락처를 적었다. 그때만 해도 다섯 자리 전화번호가 있던 시절이었다. 사무실 번호도 ‘2-4546’이었다. 지금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가난하던 시절이었고 거제는 그중에서도 낙후됐었다.
기독 청년 운동의 씨앗을 거제에 심겠다는 열망이 컸다. 열망은 나를 움직이는 동력이 됐다. 게다가 당시에는 6·10 민주항쟁 등 우리 사회가 민주화되는 데 결정적 변곡점이 된 여러 사건이 줄을 이을 때였다. 거제에도 구심점이 필요했다.
모임은 늘 기도로 시작했다. 길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의 하나였다. 거제YMCA 창립 주역인 내가 목사 아닌가. 신앙이 없는 이들도 창립 모임에 왔다가 함께 기도하는 일이 잦았다. 불만을 표하기도 했지만 YMCA의 정체성을 설명하며 양해를 구했다.
다행히 거제 시민운동의 필요성을 느꼈던 동지들이 하나둘 늘었다. 약사와 의사, 사업가들도 속속 창립 모임에 참여했다.
거제YMCA를 통해 무조건적인 사회 변혁을 꿈꿨던 건 아니었다.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사회의 건강한 변화를 바랐다. 이런 바람이 많은 공감대를 얻었다. 거제YMCA 창립을 위한 주비위원회(籌備委員會) 총회가 89년 내가 시무하던 갈릴리교회에서 열렸다. 나는 주비위원회 공동대표로 참여했다. 총회 때 단에 올라 마이크를 잡았다.
“거제에도 YMCA가 필요합니더. 여러분의 헌신으로 오늘 드디어 거제YMCA가 첫발을 내디딥니더.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의 관심과 사랑이 YMCA를 세울 것이고 거제의 시민 사회를 깨울 것입니더. 하나님의 돌보심이 거제YMCA에 가득하길 바랍니더.”
90년 창립한 거제YMCA는 실제 거제 시민 사회를 움직였다. 창립 이후에는 YMCA 대표를 맡지 않았고 거제 경실련과 거제신문 창간을 이끌었다. 돌아보니 거제 시민사회 성장을 위해 작은 조약돌을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