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미국 문예 부흥기의 대표적인 소설가 너새니얼 호손(1804~1864·아래 사진)은 인간 본연의 문제를 영적인 관점으로 심도 있게 그려낸 작가이다. 그는 대다수 작품에서 엄격한 청교도 사회를 소재로 인류의 영원한 과제인 ‘선과 악’ ‘죄와 영혼’의 문제를 다뤘다.
그의 대표작 ‘주홍글씨’(1850)는 미국 문학사에 중요한 사건 중 하나였다. 작품은 죄의 보편성과 인간의 선택이 지닌 복잡성을 다룬 미국의 ‘상징 소설’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미국적인 관점에서 죄의식과 윤리 문제를 다뤄 미국 문학에 중요한 이정표를 세웠다는 평가를 받았다. 19세기 중반의 미국 사회는 매우 보수적이어서 ‘간통’은 논란을 일으키고도 남을 만한 소재였다. 작품이 출간됐을 때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호손이 정작 관심을 가진 것은 ‘인간의 양심’이었다.
먼저 작품의 배경이 된 17세기 뉴잉글랜드의 청교도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엄격한 칼뱅주의를 신봉하는 이들은 ‘하나님의 은총’ ‘선과 악’ ‘죄와 구원’에 대한 관심이 높았으며 철저한 금욕 생활에 힘썼다. 당시 청교도들은 이민 생활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신앙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들 자신만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았다는 선민사상을 갖고 있었다. 하나님의 계명과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했지만 이에 대한 반대급부 현상으로 사랑 없는 율법 사회의 모습을 갖게 해 기독교 교리를 어긴 자에 대한 관용이나 사랑을 기대하기 힘들었다. 호손은 당시의 변질된 청교도 사회의 모습을 견고한 정통 신앙의 관점에서 직시하면서 죄의 문제를 바라봤다. 호손은 율법에 얽매여서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실천하지 못하는 청교도 사회에 비판의식을 가졌으며 ‘주홍글씨’는 이런 비판의식이 잘 반영된 작품이다.
주인공은 가슴에 간통(adultery)을 뜻하는 주홍글씨 ‘A’를 달고 살아가는 헤스터 프린이다. 헤스터 프린과 그의 남편, 애인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중심인물이다. 호손은 세 인물을 통해 인간 죄의식의 심연과 청교도의 윤리를 탐색한다. 남편이 죽은 줄만 알고 딤즈데일 목사와 사랑에 빠져 딸을 낳은 헤스터는 드러난 죄로 고립된 생활을 한다. 그러나 온갖 굴욕을 인내와 봉사의 정신으로 극복함으로써 자신의 죄를 승화시켜 구원의 실마리를 찾는다. 반면 남편 칠링워스는 죄인에 대한 벌을 하나님의 심판에 맡기지 않고 자신이 벌하려는 복수의 집념에 사로잡혀 딤즈데일을 괴롭히는 오만의 죄를 범한다. 딤즈데일은 헤스터와 범한 죄를 감추는 위선과 비겁의 죄를 저지른다.
작품에서 호손은 딤즈데일의 간음죄 그 자체보다는 범죄 이후 자신의 범죄사실을 공개적으로 고백하지 못하고 위선적인 삶을 살아가는 그의 심리적 갈등에 초점을 맞춘다. 딤즈데일은 죄를 만인 앞에 밝히지 못한 데 대한 양심의 가책, 죄의식으로 점점 쇠약해져 간다. 그가 죄에 대해 고민하면 고민할수록 그의 설교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존경을 받았다. 이중적 죄책감으로 괴로워하는 딤즈데일의 고백이다. “내 고행엔 알맹이가 들어 있지 않아요. 그건 싸늘하게 죽은 고행이요. …나는 죄인 중에도 악한 죄인이라고 실토할 수 있었다면 그것으로 내 영혼은 살아나지 않았을까? 그 정도의 진실만 있었더라도 나는 구원을 받았을 텐데. 그러나 이제는 모두가 거짓이고 모두가 허무하고 모두가 죽음일 뿐이오.”(‘주홍글씨’ 중)
고백은 속과 겉이 다른 삶을 살아온 자신의 죄를 드러내는 것이며, 동시에 모든 관계를 회복하는 방법이다. 또 자신과 공동체의 관계를 회복시키고 나아가 은혜로운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어질 것으로 기대하는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마음의 평화를 얻는 길은 자신의 죄를 진정으로 회개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일이다.
결국, 딤즈데일은 자신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자비를 인정하고 죄를 고백한다. 그는 범죄로 인해 심한 내적 갈등을 겪은 것도, 칠링워스를 통해 고통받은 것도, 그리고 만인 앞에서 온갖 수모를 당하면서 죄를 고백하게 된 것도 모두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셨기에 가능한 것이라 말한다. 그는 구원을 확신한 채 자신을 구원한 하나님을 찬미한 후 숨을 거둔다. 다음은 ‘주홍글씨’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 딤즈데일의 최후 고백이다.
“뉴잉글랜드의 주민 여러분, 이 세상의 큰 죄인이 여기 서 있습니다. 7년 전에 이 여인과 함께 섰어야 할 이 자리에 지금 비로소 섰습니다. …하나님은 알고 계시며 그분은 자비로우십니다. 그분은 무엇보다 내가 고통 속에 있을 때 그분의 자비를 보여주셨습니다. 내 가슴에 이 불타는 고뇌를 주심으로써 그러하셨습니다. 저 음흉하고 무서운 노인(칠링워스)을 보내셔서 항상 그 고뇌가 빨갛게 불타오르게 하였습니다. 이곳으로 나를 보내셔서 사람들 앞에서 치욕스러우나 승리의 죽음을 맞이하게 하였습니다. 이런 고통 중 하나라도 없었더라면 나는 영원히 멸망하였을 것입니다. 그분의 이름이 찬양받을지어다. 그분의 뜻이 이루어질지어다. 안녕히 계십시오.”(‘주홍글씨’ 중)
그는 목사로서는 실패한 사람이었으나, 생의 마지막 순간은 승리한 사람이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죄를 고백하며 진정으로 회개했다. 그의 행위는 주위에 다른 죄 있는 영혼들에게 던지는 메시지이다.
호손이 뉴잉글랜드 청교도들의 생활상을 소설의 주요 주제로 삼은 것은 전통적으로 엄격한 청교도였던 그의 조상들의 영향이 컸다. 호손의 가장 윗대인 윌리엄 호손은 세일럼에서 치안판사를 지냈고, 고조부 존 호손은 17세기 말 세일럼을 중심으로 행해진 ‘마녀재판’ 때 잔인한 재판관 노릇을 했다. 그 까닭으로 호손의 의식은 늘 어두운 죄의식에 무겁게 짓눌려 있었던 듯하다.
호손은 보든 대학을 졸업한 후 첫 소설 ‘판쇼’(1828)를 출판했으나 뒤에 미숙한 작품이라고 생각해 회수해버렸다. 이후 1837년 단편집 ‘트와이스 톨드 테일즈’를 발표했으며 2년 후 경제적 불안을 벗어나기 위해 보스턴 세관에 근무하며 글을 썼다. 1842년 소피아 피보디와 결혼해 행복한 가정생활을 꾸려가면서 ‘주홍글씨’와 청교도를 선조로 가진 자손에게 악의 저주가 걸린 내용의 ‘일곱 박공의 집’을 발표해 이름을 알렸다. 이후 1853년 영국 리버풀 영사로 부임한 후 작고할 때까지 꾸준히 작품을 집필했다.
호손이 미국 소설가 중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은 적어도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그는 소설 형식에 대한 인상적이고 구성적인 감각을 지닌 숙련된 장인이었다. 둘째는 도덕적 통찰력을 지녔다는 것이다. 그는 인생을 깊고 정직하게 들여다봤으며 고통과 갈등을 메워주는 사랑의 힘을 발견해냈다. 셋째는 비유와 상징에 정통했다는 것이다. 그의 문학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침울하고 압축된 분위기 속에서 힘의 무게와 진정한 비극의 필연성을 만들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