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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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영성 작가] 사람이 만든 사슬 끊고 영원한 자유 바라봅니다 이 땅에 구원을 이루소서

입력 2022-09-17 03:10:01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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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 부인’으로 불리는 미국의 작가 해리엇 비처 스토(1811~1896·아래 사진)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 것은 소설 ‘톰 아저씨의 오두막’이다. ‘활자가 된 노예의 슬픔’이 담긴 이 한 권의 책이 당시 미국 문명의 물줄기를 바꾸는 마중물이 될 줄 아무도 알지 못했다.

19세기 미국은 성직자들이 앞장서 기독교의 만민평등의식에 어긋나는 노예제도를 옹호하는가 하면 묵인하는 상황이었다. 노예제도의 수용은 미국 사회가 기독교 정신을 저버리고 이기주의 물질주의 합리주의를 택했음을 보여줬다. 이에 미국이 이상적인 기독교 국가로 발전하길 염원했던 작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글을 써서 세상을 바꾸고자 했다.

작가가 ‘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바는 명확했다. 자식을 제 손으로 죽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죽음보다 더 두려운 고통으로부터 안식을 얻었던 흑인 어머니의 관점에서 노예들의 고통을 백인들에게 알렸다. 특히 독자의 공감을 얻어낼 수 있는 사건과 윤리적인 인물들을 통해 종교적인 가치를 확고히 전달했다. 스토의 신앙과 삶 그리고 문학은 하나였다.

‘톰 아저씨의 오두막’에 기록된 사건들은 작가가 직접 관찰했거나 사실을 토대로 한 자료를 수집해 쓴 이야기이다. 그는 오하이오 강을 경계로 남부와 인접해 있는 신시내티에서 18년간 거주했기 때문에 탈출한 노예를 만날 기회가 많았다. 또 탈출한 노예들을 헌신적으로 도와주면서 노예제도의 실상을 낱낱이 알게 됐다. 노예제도는 흑인을 노예로 삼아 비참한 생활 가운데 신을 부정하도록 조장하기 때문에, 만인의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본 교리로 하는 기독교 관점에서는 용서할 수 없는 제도였다.

‘톰 아저씨의 오두막’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는 켄터키의 부유한 농장주 셀비가 사업에 실패하고 막대한 빚을 갚기 위해 어린 시절부터 자신과 함께 성장한 노예 톰과 하녀 엘리자의 다섯살 난 아들 해리를 노예상에게 팔고자 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톰은 신앙인의 상징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켄터키에 있는 그의 오두막집에서는 매일 작은 부흥회가 열렸다. 많은 사람이 존경하고 아꼈던 톰에게 그림자가 다가왔다. 노예시장에서 물건처럼 값이 매겨져 팔려 간 톰. 그의 충직함과 진실함을 인정해준 주인도 있었지만, 그의 신앙심마저 꺾으려고 모진 고통을 준 악마 같은 농장주도 있었다. 결국 농장주 리그리의 손에 목숨을 잃게 되지만, 톰은 끝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

소설은 신앙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 힘들지만, 용기 있고 값진 것이란 사실을 뜨거운 목소리로 일깨워준다. “주님, 얼마나 더 고통을 당해야 합니까” “주님, 왜 우리를 도와주지 않으십니까”라는 신음이 목화밭에 안개처럼 깔릴 때, 톰은 다른 노예들을 도와주고 성경을 읽어주며 희망을 잃지 말라고 당부한다. 농장주 리그리는 톰에게 목화를 적게 딴 흑인 노예를 매질하라고 채찍을 주지만, 톰은 절대로 할 수 없다고 거절한다. 리그리의 잔혹한 매질에 톰은 “주인님이 저를 사셨지만 제 영혼의 주인은 아닙니다”라고 부르짖는다.

“저의 영혼은 주인님의 소유가 아닙니다. 나리는 저의 영혼을 사지 않았습니다. 살 수가 없습니다. 제 영혼을 지켜줄 수 있는 분만이 값을 지불하고 제 영혼을 살 수 있습니다. 어떤 짓을 해도 나리는 제 영혼을 해칠 수 없습니다…. 주인님이 제 육신을 죽인 다음에 더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다음에는 영생이 옵니다.”(‘톰 아저씨의 오두막’ 중)

이때 ‘영생’이란 단어는 톰의 영혼에 빛처럼 짜릿하게 비췄다. 또 사악한 자의 영혼에도 전갈에 물린 것 같은 전율을 일으켰다. 작가는 미국의 모든 기독교인에게 그동안 미국이 국가의 이름으로 아프리카 인종에게 가했던 악행을 조금이라도 치유할 책임이 있지 않으냐고 묻는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 그리스도의 정신과 일치하는지, 현실 정책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궤변에 휘둘리거나 타락하지 않았는지를 묻는다.

노예제에 대한 작가의 비판의식은 통렬하다. 그는 작품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한 인도적인 법률가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을 최악으로 학대하는 방법은 그를 교수형에 처하는 것이다.’ 틀렸다. 그보다 더 나쁘게 인간을 학대하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노예제도이다.” “사람을 말처럼 사고 이를 검사하고 관절을 꺾어보고, 걸음걸이를 검사한 다음 값을 치른다. 노예 투기꾼들이 이 문명사회에서 인간을 물건처럼 진열한다. 그 물건이 본질에서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인데 말이다.”

스토는 미국 코네티컷주 리치필드에서 엄격한 칼뱅파 목사 라이언 비처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그는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에서 교사로 일하며 문학 활동을 했으며 지역신문에 단편소설과 에세이 등을 기고했다. 스물다섯살이 되던 해 신학교 교수 캘빈 엘리스 스토와 결혼했다. 이후 노예제도의 실상을 친구들을 통해 듣거나 직접 남부를 방문해 알게 된 그는 노예제도에 반감을 갖게 되었다. 그 때문에 도망쳐온 노예를 남편과 함께 보살폈다.

1850년 발표된 ‘도망노예단속법안’으로 노예제도에 대한 그의 분노는 점점 커졌다. 스토는 반노예제 신문 ‘내셔널 이러’지에 ‘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연재했다. 이 작품은 1852년 단행본으로 출간되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됐으며 ‘노예제도에 대한 격렬한 탄핵의 기백으로 가득 차 있는 위대한 멜로 드라마’라는 칭송을 받았다.

반면 남부에서 스토의 이름은 증오의 대상이었다. 동시에 동부에 사는 미국인들을 감동하게 해 남북전쟁을 일으키는 하나의 계기가 됐다. 이후 스토는 많은 자료와 증언을 보강해 ‘톰 아저씨 오두막의 열쇠’(1853)를 내놓았다. 또 같은 반노예 소설 ‘드레드’(1856) 외에 뉴잉글랜드의 청교도를 그린 ‘목사의 구혼’(1859) ‘올드 타운의 사람들’(1869) 등을 출간했다.

남북전쟁이 터진 것은 ‘톰 아저씨의 오두막’이 출판되고 9년 뒤인 1861년이다. 1862년 미국의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한 모임에서 만난 스토에게 “당신이 큰 전쟁을 일으킨 작은 부인이군요”라고 말했을 정도로 이 작품이 미친 사회적 영향은 컸다. 링컨 대통령이 말한 큰 전쟁이란 남북전쟁을 의미한다. 스토는 그때 “그 작품은 제가 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쓰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링컨이 노예 해방 선언을 한 것은 이듬해인 1863년 1월 1일이었다.

스토가 자신의 행동이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은 신앙 때문이었다. 그는 세월이 흘러 세상의 많은 슬픔과 부정이 사라지고 ‘톰 아저씨의 오두막’ 같은 이야기는 단지 오래전에 사라진 악행에 대한 기념비 정도로만 여겨지길 바랐다. 훗날 이집트의 노예생활을 회상하는 이스라엘 민족처럼 노예 시절을 회상할 수 있길 소망했다. 흑인들이 출애굽 한 이스라엘 민족처럼 자신들을 구출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릴 것을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책 말미에 이렇게 썼다.

“정치가들이 서로 다투고 사람들이 이익을 추구하는 열정의 거센 파도에 이리저리 휩쓸리고 있는 동안에도 인간의 자유는 그것을 주관하는 위대한 분의 손안에 있다. 그분은 지상에 심판을 이룰 때까지 실패하거나 낙망하지 않는다.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는 자들이 부르짖을 때 그분께선 그들을 구원하신다.”

행동하는 그리스도인 해리엇 비처 스토는 미국 플로리다주 만다린에서 여생을 보내며 예수의 정신으로 흑인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교육에 온 힘을 다했다. 그는 흑인들에게 희망의 빛을 던져준 ‘흑인의 어머니’로 불린다.

이지현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jeeh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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