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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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예배 365-10월 22일] 성전에 하나님이 없다 (예루살렘 성전)

입력 2022-10-22 03:10:01


찬송 : ‘인애하신 구세주여’ 279장(통337)

신앙고백 : 사도신경

본문 : 마태복음 21장 12~17절


말씀 : 갈릴리에서 예수님은 물과 같았습니다. 갈릴리호수처럼 시들어가고 죽어가는 온갖 생명을 구석구석 살리시는 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의 모습은 뜨겁게 달아오른 불과 같은 모습입니다. 어디에 빛이 있는지 정확하게 보여주시는 불 말입니다. 모든 거짓은 태우시는 불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지구 안에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있는 거룩한 도성이며 온 세상의 중심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성전에는 하나님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성전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무엇인지 세 가지만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성전의 절대화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로 가득한 공간이지만 그렇다고 건물 자체가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성전은 사람의 손으로 지어졌기에 얼마든지 우상이 될 수 있으며 일시적이라 깨어질 수 있습니다. ‘거룩한 땅’이나 ‘거룩한 백성’이란 말처럼 유한하고 ‘거룩’이라는 말을 붙인다 해도 언제든지 타락할 수 있습니다. 구약과 신약의 유대인들은 성전 자체의 절대성을 믿었기에 선지자들의 경고에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습관적으로 절대화시킨 우상은 없습니까. 믿음의 가문, 모태신앙, 직분, 헌금, 봉사로 나는 무조건 괜찮을 거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변화와 생명을 위해 나를 얼마든지 터뜨리고 깨뜨릴 수 있습니다.

둘째, 성전의 배타주의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 모든 민족이 복을 받게 하셨고 성전을 통해 모든 민족이 하나님을 경배하며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복이 흘러가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성전을 모든 민족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자기들만을 위한 소수의 배타적 공간으로 만들었습니다. 거룩한 축복은 반드시 영향을 주게 되어 있습니다. 나의 부르심과 구원과 축복을 나와 내 가족만을 위한 것으로 여기고 일상과 일터와 이웃에게 흘려보내지 않는다면 그 축복은 성전에서 나온 축복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셋째, 성전의 상업주의입니다. 타락의 끝은 종교 정치 예술을 직업으로 삼는 것입니다. 작품이 상품이 되어 가격이 정해지고 그 가격에 나의 가치가 결정되는 것이 타락입니다. 그리하여 예루살렘의 모든 제물은 제사장들의 대형 마트형 강도소굴이 되었습니다. 한국교회가 어린이부와 청소년부, 장년부에 따라 사역의 가치를 매기고 이윤과 실효성을 따진다면 하나님은 그 교회를 떠나시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전 정화는 종교인들의 심장부를 건드렸습니다. 구약의 느헤미야도 성전 정화를 했습니다. 엘리아십이라는 제사장이 도비야와 내통하여 성전 안에 그의 방을 내주고 그가 한 자리를 버젓이 차지하는 악한 일이 생겼습니다. 그러자 느헤미야에게 불같은 마음이 일어나 그는 도비야의 세간을 전부 내다 버리고 그 방을 정결하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도 느헤미야도 이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권위를 아버지께 부여받았습니다.

오늘날 교회에도 엘리아십과 도비야가 있습니다. 성전의 심장부에 하나님과 상관없는 절대주의 배타주의 상업주의라는 세간들을 내다 버립시다.

기도 : 주님, 우리 교회에 헛된 세간과 내통하는 도비야를 모두 쫓아버릴 수 있는 권위와 불같은 마음을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주기도문

조순미 목사(인천 올리브나무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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