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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주기 권력교체’ 전통 깬 장기집권… 마오 버금가는 위상

입력 2022-10-24 04:10:01
시진핑 집권 3기의 최고지도부인 정치국 상무위원 7명이 23일 기자회견을 위해 베이징 인민대회당에 입장하고 있다. 왼쪽부터 입장 순서대로 시 국가주석, 리창 상하이시 당서기, 자오러지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서기, 왕후닝 중앙서기처 서기, 차이치 베이징시 당서기, 딩쉐샹 중앙판공청 주임, 리시 광둥성 당서기. AFP연합뉴스


중국의 10년 주기 권력 교체 전통을 깨고 세 번째 집권을 확정한 시진핑 국가주석은 신중국을 세운 마오쩌둥에 버금가는 절대 권력을 쥐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22일 폐막한 중국 공산당 20차 전국대표대회(당 대회)를 거쳐 시진핑 사상의 지도적 지위를 확립하는 내용이 당장(黨章·당헌)에 명기됐을 것으로 분석된다.

23일 중국 관영 신화통신에 따르면 당 대회 결의문에 “19차 당 대회 이후 시진핑 사상의 새로운 발전을 당장에 명문화함으로써 당 중앙이 이룬 성과를 보다 잘 반영하는 데 동의했다”는 내용이 담겼다. 결의문은 “두 개의 확립의 의미를 깊이 이해하고 시진핑 사상을 전면적으로 관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시 주석의 당 중앙 핵심 지위 확립과 시진핑 사상의 지도적 지위 확립이 당장에 삽입됐을 가능성이 크다는 평가다.

시 주석은 1953년 6월 중국의 8대 혁명 원로 중 한 명인 시중쉰 전 부총리와 아내 치신 사이 2남 2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부친인 시중쉰이 중앙선전부장과 부총리 등 요직을 맡은 덕분에 중국 지도부가 모여 사는 중난하이에서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시 주석이 9살이던 1962년 아버지 시중쉰이 마오쩌둥 측근의 모함을 받아 실각하면서 시련이 시작됐다. ‘중난하이의 도련님’에서 하루아침에 반당 분자의 자식으로 전락한 것이다. 시 주석 가족은 이후 문화대혁명 때 서북 산시성 옌촨현의 산간벽지 량자허에서 토굴 생활을 하며 7년을 보냈다. 시 주석은 문혁 시대 7년의 하방 경험을 정치적 자산으로 삼고 있다. 시 주석은 중국 공산당 문을 집요하게 두드려 1974년 10번 만에 입당에 성공했고 문혁 후기인 1975년 칭화대 공대에 입학했다. 그 무렵 시중쉰이 복권되면서 시 주석도 엘리트 당원의 길을 걸었다.

시 주석이 2012년 18차 당 대회에서 총서기에 올랐을 때만 해도 그가 부패에 찌든 중국을 개혁할 거라는 국제사회의 기대감이 있었다. 시 주석 본인이 문화대혁명의 폐해를 직접 겪은 만큼 정치 민주화와 경제 성장을 추구할 것으로 예상됐다. 그러나 집권 10년 이러한 관측은 모두 빗나갔다. 시 주석은 대외적으로 강한 중국을 과시하면서 내부적으로는 사상 통제를 강화했다. 임기 10년 동안 장기집권과 1인 통치를 위한 작업을 착착 진행했다. 호랑이(고위 관리)와 파리(하위직)를 모두 때려잡는 강력한 부패와의 전쟁을 펼쳐 정적들을 제거했다. 중국은 정부 정책에 대한 비판과 이견이 용납되지 않는 사회가 됐다.

베이징=권지혜 특파원 jhk@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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