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그 시절을 다시 돌이킬 수 없다 해도/ 우리 슬퍼하기보다, 차라리/ 뒤에 남은 것에서 힘을 찾으리/ 지금까지 있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있을… 인간의 고통에서 솟아 나오는/ 마음의 위안을 주는 생각과/ 죽음 너머를 보는 믿음에서/ 사색의 마음을 가져오는 세월 속에서.”(‘초원의 빛’ 중)
낭만주의 문학의 선구자, 자연주의 시인, 호반의 시인…. 영국의 계관시인 윌리엄 워즈워스(1770~1850·사진)를 수식하는 말이다. 영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워즈워스의 시 한 구절 정도는 암송할 정도로 지금까지 많은 사랑을 받는 시인이다. 국내에도 그의 이름은 자연과 인생의 내면적 교감을 잘 표현한 ‘초원의 빛’ ‘무지개’ ‘수선화’ 등으로 친숙하다.
그는 누구보다도 자연을 사랑한 시인이다. 그에게 자연은 단순히 외부적인 경관일 뿐만 아니라 영혼의 안식처였고 초월적 상상력이 투영된 자연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자연에서 ‘영혼의 치유력’을 얻을 수 있다고 여겼다. 그는 세상에서 고통을 받거나 괴로움을 당할 때 자연 속으로 되돌아가야 정신적인 위로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관심사는 언제나 ‘인간과 자연’이었고, 인간에게 미치는 자연의 영향을 체험을 통해 규명하고자 했다. 그는 분명 ‘시 치료(poetry therapy)’의 가능성을 보여준 시인이다.
그가 자연을 사랑하게 된 이유는 성장 과정을 통해 드러난다. 그는 영국 북부의 호수가 많고 아름다운 코커마우스 마을에서 성장했다. 8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13살 때 변호사인 아버지마저 잃고 숙부의 보호 아래 자랐던 워즈워스는 가정에서 느끼지 못했던 사랑을 자연에서 발견했고 어린 나이에 고독의 자족 능력을 갖게 됐다. 어쩌면 학교 교육보다 더 큰 영향을 준 것은 에스웨이트 계곡과 그 주위의 초원지대였을 것이다. 그는 자연과의 영적 교감을 정신적 승화의 과정을 거쳐 시로 형상화했고, 자연에서 얻은 깨달음과 진리, 도덕적 교훈을 아름다운 시어로 전달했다.
워즈워스는 1791년 케임브리지대학교 세인트존스 칼리지를 졸업하고 프랑스로 건너가 프랑스혁명에 깊숙이 가담했다. 이즈음 프랑스 여인 아네트 발롱과 사랑에 빠져 딸 캐롤라인을 낳았다. 그러나 숙부의 강력한 반대와 프랑스와 영국의 전쟁으로 그들의 결혼이 무산돼 사랑의 상처로 상심했다. 그는 당시 교회 조직의 과도한 위계질서에 대한 환멸로 자신이 세례받았던 국교(성공회)에 등을 돌리고 자연 자체에 몰입했다. 그러나 프랑스혁명이 점차 과격해지고, 영국과 프랑스 간 전쟁까지 겹치자 자신이 믿고 있던 정치철학이 너무나 비현실적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절망에 빠진다. 이 같은 정신적 위기로부터 그를 구출해 낸 것은 바로 자연이 가진 영적 치유력이었다. 이는 그가 후기에 이르러 회심하게 된 계기였다.
영국으로 돌아온 워즈워스는 고향 호수지방 그래스미어에 작은 집을 얻어 시작(詩作)에 몰두했고 1802년 메리 허친슨과 결혼했다. 비평가들은 1796년부터 1806년까지를 워즈워스가 가장 왕성하게 창작 활동을 했던 시기로 본다. 이 시기에 대표작 ‘서곡’과 ‘영혼불멸송’이 완성됐다. 또 두터운 우정을 쌓아온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와 함께 ‘서정민요시집(Lyrical Ballads)’(1798)을 발간했다. ‘서정민요시집’은 낭만주의 문학의 효시로 불린다.
13편으로 구성된 ‘서곡(Prelude)’은 그의 정신적 성장사를 보여준다. 유년기부터 28세까지의 생애가 전기적 순서로 놓인 영혼의 자서전이다. ‘서곡’에서 눈에 띄는 서술기법은 ‘시간의 점들’에 대한 회상이다. 시에서 시간의 점들은 한순간 신비로운 모습으로 나타나 기억을 지배하고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일상의 숱한 기억을 밝게 비춰 준다. 시인은 이 점들을 과거의 사건이 아닌 현재적 사건으로 해석해 서사적 고백 시를 완성했다.
“우리의 존재 가운데는 분명히 드러나게/ 회복의 힘을 지닌 시간의 점들이 있나니. 그로 인하여 우리가/ 나쁜 평판이나 골치 아픈 생각/ 혹은 사소한 일거리와 일상적 교제의/ 연속에서 겪는 더 괴롭고 심한 일로/ 기가 꺾일 때, 우리의 영혼이/ 영양을 취하고 남몰래 치료된다.”(‘서곡’ 11편 중)
그의 시엔 치유와 회복이 있다. ‘수선화’에서도 그는 옛날 수선화를 통해 느낀 기쁨을 시간이 지난 후 혼자 있을 때 회상하고 그렇게 재경험함으로써 다시 즐거움을 느낀다. 그의 시가 과거의 경험을 주시하고 그것을 다시 회상하는 과정으로 이루어진 것은 그의 인간 심리에 대한 이해 때문이다.
“공허하거나 구슬픈 기분에 젖어/ 소파에 누워있을 때면 시시때때로/ 그 수선화들이 고독의 축복, 저 마음의 눈에 번득 떠오른다/ 그럴 때면 내 가슴이 기쁨에 넘쳐/ 수선화들과 함께 춤을 춘다.”(‘수선화’ 중)
또 ‘무지개’를 읽고 감동할 때 그것은 시 자체에서 오는 감동이라기보다 워즈워스라는 시인의 인간성과 삶에서 오는 감동인지도 모른다. 시적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과정 자체를 탐색적으로 그려나가는 점이 독창적이고 여기에다 종교성을 가미해 영원성을 부여한다.
“내가 하늘의 무지개를 볼 때/ 내 가슴은 뛰노라/ 내 삶이 시작되었을 때도 그랬고/ 내가 성인이 된 지금도 그렇다/ 내가 늙을 때도 그럴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나를 죽게 하라/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내 생애 하루하루 경건히/ 자연에 순종하며 살고 싶다.”(‘무지개’ 중)
워즈워스의 초·중기 작품은 의도적이든 아니든 간에 자연과 창조주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회피했다. 그러나 회심 이후 쓴 ‘서곡’에서는 ‘자연 그 자체, 신의 숨결’ 등 확실하게 창조주를 언급하고, 신은 하늘과 땅에 널리 퍼진 주권적 지성이며 우리의 영혼과 맞닿아 있다고 말했다. 이전에 자연 만물에서 느껴지던 영적 존재는 ‘서곡’에서 신으로 확실히 구체화한다. 그는 자연에 드러나는 신비로운 신의 존재를 향해 평생의 헌신을 선언한다.
“기쁨을 고취하는 힘은/ 우리 안에 스며들어/ 높은 곳에 있을 땐 더 놓은 곳으로 오르게 하고, 쓰러질 땐 일으켜 세워주지/ 이 효능 있는 영은 얼마나 어떻게/ 마음이 주인이자 스승이며 외적 감각은/ 마음의 의지에 순종하는 종이라는/ 심오한 지식을 제공하는 인생 여정 속에 주로 숨어 있다네/ 이러한 순간들은 우리의 아주 어린 시절부터/ 인생 곳곳에 흩어져 있지.”(‘서곡’ 11편 중)
당시 옥스퍼드대 교수였던 존 케블은 워즈워스에 대한 헌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진정한 철학자요, 영감 넘치는 시인 워즈워스에게 이를 바친다. 그는 특별한 재능과 전지전능한 신의 부름으로 인간과 자연에 대해 노래하면서 한 번도 인간의 마음을 신성한 것에 올리지 않은 적이 없었고… 위기의 시대에도 아름다운 시와 숭고하고 신성한 진리의 성직자로 높임을 받았다.”
‘다시 찾은 야로우와 기타 시편들’은 노년에 접어든 그가 자연과 인간 삶에 대한 사색을 거쳐 궁극적 가치로서 종교를 역설한 작품이다. ‘다시 찾은 야로우…’ 제13번 ‘쉬면서 감사하라, 글렌크로우 꼭대기에서’는 자연과 종교를 통합적으로 언급했다. 힘든 산길의 꼭대기에 올라 ‘쉬면서 감사하라’는 표지를 발견한 시인은 지금 걸어온 산길만이 아닌 인생 전체의 길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영혼은, 믿음이 부여하는 권능을 통해/ 안식과 평안과 평화를 얻으리라 천사들이 함께 누리는 지복까지.” 감사는 삶 전체에 대한 종교적 의미의 감사로 귀결된다. 그는 믿음이 주는 안식과 내세의 지복(bliss)까지 확신한다.
이어 시인은 시 후반부에서 단언한다. “천국이 안중에 없다면, 우리 소망이란 무엇이랴/ 탐욕스레 달라붙는, 우리네 어리석은 회한들이란/ 학자의 이론, 시인의 노래란.” 이처럼 세속적 야망의 헛됨을 반복적으로 지적하고 종교적 가치의 소중함을 역설한 것은 인간과 세상에 대해 워즈워스가 말년에 궁극적으로 도달한 생각이 아닌가 싶다.
그는 종교적 가치의 전달자로서의 시인이었다. 그는 생명이 없는 사상의 메아리가 아니라 살아있는 목소리였다. 그는 인간의 마음이 자연의 세계보다 더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창조적 상상력의 작용을 통해 신의 존재를 자각하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더 신성하다는 것을 전하고자 했다.
“만약 신의 섭리가 우리에게 이러한 은총을, 확실히 다가올 인간 구원의 은총을 내려준다면 자연의 예언자들로서 우리는 미래의 인간들에게 이성과 진리에 의해 성스러워진 영원한 영감을 이야기하리라.”(‘서곡’ 13편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