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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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유이상 (15) 대출 막혀 계약 물거품… 미국서 기술 산 호주 회사 수소문

입력 2022-12-06 03:10:01
풍년그린텍 안산 공장에서 펄프 몰드 방식으로 계란판이 제조되고 있는 모습. 안산=신석현 포토그래퍼


당시 30만 달러는 우리 회사에 굉장히 부담스러운 금액이었다. 하지만 꼭 펄프 몰드(pulp mold) 기술을 도입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한국에서는 계약 전 대출을 타진했고 은행에서도 별 문제 없이 대출해 줄 것처럼 이야기했는데 막상 계약하고 나니 은행이 한발 물러나 대출 불가 결정을 내렸다. 낭패였다. 1차로 지급해야 할 대금을 미국 회사에 지급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면서 계약은 파기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1년 뒤, 다시 그 회사를 찾았을 때 그들은 30만 달러 분할 지급 방식이었던 것에서 입장을 바꿔 50만 달러 일괄 현금 지급을 요구했다.

‘세상에. 30만 달러를 5년 걸려 분할 지불하기도 힘든데 일시불로 50만 달러를 달라니.’ 우리 회사 형편으로는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5번이나 미국을 방문하면서 작성한 계약은 그렇게 물거품이 됐다.

하지만 펄프 몰드 사업은 꼭 해 보고 싶었다. 야심 차게 도전했던 일이라 이대로 끝낼 수는 없었다. 펼프 몰드 회사에서 가장 매력적으로 보였던 건 공장의 시스템이었다. 한국은 종이 만드는 회사는 종이만, 박스의 원자재가 되는 판지 만드는 회사는 판지만, 박스 만드는 회사는 박스만 생산했다. 제지공장 판지공장 박스공장 등 3단계로 나뉘어 있었는데 미국 회사를 보니 그 3가지를 모두 제지공장과 계열사에서 소화하고 있었다. 이것이 매우 합리적인 방식으로 여겨졌다.

계약은 무산됐지만 이대로 물러설 순 없었다. 그때 미국 회사와 계약할 때 미국 측 자문 변호사가 다른 회사와의 계약서라며 초안을 보여줬던 일이 떠올랐다. 계약서 사본은 중요한 회사 정보들을 매직펜으로 지운 상태여서 내용이 잘 보이지 않았다. 당시 변호사가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 힐끗 계약서를 보고 회사 이름을 메모해뒀던 게 생각난 것이다. 당장 메모장을 찾았다. 그러곤 회사 이름과 호주에 있는 펄프 몰드 회사를 대조해가며 수소문을 시작했다. 코트라(KOTRA)에도 수차례 확인 요청을 했다.

그렇게 결국 미국 회사가 펄프 몰드 기술을 팔았던 호주 회사를 찾아냈다. 쇠뿔도 단김에 빼야 한다고 했다. 그길로 호주로 날아가 회사를 찾아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기술을 산 호주 회사는 펄프 몰드 사업을 접은 상태였다. 예상보다 수익성이 떨어진 데다 공장에 불이 나서 더 이상 사업을 진행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호주 회사와 사업을 계약해 보려던 계획도 수포로 돌아갔다.

또 한 번 마음을 다잡았다. 결코 포기할 수가 없었다. 귀국해 기도하던 중에 호주 회사에서 펄프 몰드 기계를 다뤘던 기술자를 찾으면 뭔가 해법이 나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호주로 갔다. 미국 회사에서 도면을 받아 펄프 몰드 기계를 제작했던 기술자를 찾아냈다. 펄프 몰드 사업을 여는 첫 번째 입구의 열쇠를 확보한 기분이었다.

호주와 한국을 6번 오가며 펄프 몰드 기계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호주에서 제작해 들여오고 도면 구입 비용으로 5만 달러를 지불하기로 계약했다. 오로지 펄프 몰드 사업을 하고 싶다는 열망, 그리고 무모함에 가까운 도전 의식이 낳은 성과였다.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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