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최고 인기를 끌었던 유행가를 꼽으라면 아마도 ‘엘리제의 여왕’ 이미자씨가 부른 ‘섬마을 선생님’일 것이다.
마침 고제초등학교에는 다섯 명의 총각 선생님이 있었는데 모두 나이가 많았다. 그래서인지 홍일점인 처녀 선생님에게 그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건 당연했다. 총각 선생님들 중에서도 가장 어린 선생님이 오르간을 치는 처녀 선생님에게 노래를 부르며 다가갔고 점점 친해졌다. 짝은 하나밖에 없는지라 1살 위였던 그 총각 선생님과 처녀 선생님은 결혼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결혼식을 올리자마자 문제가 생겼다. 허니문 베이비가 들어서면서 여 선생님은 2년 동안 담임을 맡은 고제초등학교를 그만두게 됐다. 게다가 남 선생님은 군 미필자였던 탓에 결혼식을 올리고 열흘 만에 입대했다. 어쩔 수 없이 부부는 생이별한 채 함께할 수 없는 고통을 안게 됐다.
그럭저럭 36개월의 시간이 흘러갔고 군생활 막바지 남편이 제대 10개월을 남겨두고 휴가를 받아 나왔을 때 하나님의 은혜로 아들이 들어섰다. 아마도 제대를 앞둔 남편의 마음은 이미 콩밭에 가 있었을 터. 군복무를 마치고 돌아온 남편에게 안겨준 선물이 아들 최성권, 바로 나였다.
제대한 아버지는 교장 선생님인 할아버지의 도움으로 거창화산초등학교로 발령을 받았다. 학교 주변에 나환자촌이 있어서 다른 지역의 학교에 비해 고과 점수를 많이 받았고 덕분에 승진에 도움이 됐다고 한다. 내 아래로 여동생이 생기면서 이제 가족은 다섯으로 늘었다. 놀랍게도 바로 윗 형이 먼저 교회를 다니게 되자 6살이던 나와 두 살 아래인 여동생도 덩달아 교회를 다니며 신앙생활을 하게 됐다.
그때까지만 해도 신앙생활과 무관하던 어머니는 초등학교 2학년이던 여동생을 통해 놀라운 경험을 했다. 당시 여동생은 친구들과 놀다가 가방을 던져두고 오는 일이 잦아지곤 했다. 어느날 여동생이 던져둔 가방을 잃어버렸다. 어머니와 함께 가방을 찾으러 나섰지만 찾을 수가 없자 두 모녀가 찾아간 곳이 교회였다. 교회 전도사님은 교회에서 울고 앉아 있는 두 모녀를 보고 달려 나왔다. 그러고는 어머니와 여동생의 손을 꼭 잡고 기도를 해주셨단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엄마도 같이 교회에 나와야 되겠네요”였다. 잠시 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다리 밑에서 놀다가 던져둔 가방을 어떤 아주머니가 주워왔다는 연락이 온 것이다.
그렇게 여동생의 가방을 찾게 된 것이 계기가 돼 어머니도 그 날부터 신앙생활을 하게 됐다. 이따금씩 어머니는 “하나님이 부르는 방법은 다양하더라고요. 참 신기해요”라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거창 읍내로 이사를 한 후로 어머니는 거창교회를 모교회로 삼아 신앙생활을 해 오셨다. 신앙의 성장과 함께 어머니의 전도에 대한 열정은 2등하면 서러울 정도로 뜨거웠다. 그래서 만나는 사람들을 송사리떼 몰 듯 교회로 인도했다. 학창시절 친하던 친구부터 노인까지 가리지 않고 복음을 전했다. 올해 76세의 어머니는 지금도 매일 성경을 읽으며 말씀을 묵상하고, 권사의 직분을 잘 감당하면서 만년 구역장으로 온전히 섬기며 봉사를 도맡아 기쁨으로 감당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