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여 내가 죽겠나이다, 나를 살리소서~~~!!!
누굴까, 소리를 지르는 사람은? 집에는 아무도 없고 나는 입을 달싹일 힘도 없는데 순간, 내 영혼이 내 육신을 대신해 하나님께 도움을 간구했다는 것이 깨달아졌다.
잠시 후, 이 골 저 골에서 쏟아지는 것 같은 많은 물소리, “할렐루야” “할렐루야” 하는 것 같은 소리가 나를 둘러쌌다. 그야말로 애간장이 녹아내리는 탄식이었다. 열이 펄펄 나는 자식의 곁에서 물수건을 연신 갈아대는 엄마. 그 안타까움, 타는듯한 뜨거운 입김을 오른쪽 뺨에 감지하며 가물가물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깊은 안식에 들어가게 되었다. 몇 시간이나 지난 것일까?
눈이 떠졌다. 창밖으로 이른 새벽의 짙푸른 하늘이 보였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이제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기쁨과 감사와 평강이, 행복이 맑은 물처럼 출렁거리고 있었다. 발가락이라도 행여, 손가락이라도 자칫 움직이다가는 그것이 “또르르” 흘러내릴 것만 같아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시고 생기를 불어넣으신 것 같은, 표현 불가한 그 태초의 신선함 속에서 기쁨으로.
누가 나를 위해 밤새 기도한 것일까, 그렇게 창자가 녹도록. 그때, 로마서 8장 26절의 말씀이 번개와 같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이처럼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그날 이후, 나는 기쁘고 감사하고 행복했다. 그렇게 기진했던 육신도 상쾌해졌다. 참으로 신기한 것은, 언제 그런 시끄러움이 있었냐는 듯 교회도 거짓말같이 잠잠해졌다.
무시무시하던 태풍이 마침내 다 지나가고 햇빛 쨍쨍한 새날이 밝은 것처럼. 교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 그리고,….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다. (요 1:1) 곧 하나님이신 말씀이 친히 임하심으로 말미암아 멸망과 사망의 세력은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할렐루야!!!
1993년 7월, 한 사람을 만났다. 한국에서 LA로 집회를 하러 오신 요한선교단의 박종면 전도사. 그는 알코올중독이 심해져서 마침내 간질 발작까지 일으키게 되었고, 어머니와 아내를 제외한 가족들은 차라리 그가 죽기를 바랐던 사람이었다.
보통 집회를 하기 전에 광고들을 한다, 신문이나 방송으로. 그러나 집회를 담당할 당사자가 방송국에 와서 간증하게 되면 그 홍보력은 객관적에서 주관적으로 바뀌게 되므로 가히 효과적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그때 당시 이런저런 프로그램들과 함께 ‘새롭게 하소서!’를 담당하고 있던 내가 그를 만나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듣게 되었고, “내가 이 사람을 만나려고 이 자리에 있었구나!” 분명한 깨달음이 왔다.
당시도 나의 건강이 좋지 않았다. 1990년 11월 말경, 신학교에서 한 class를 같이했던 임수홍 권사님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만나게 되었다. “하나님께 아무리 기도를 드려도 당신 이름 밖에는 떠오르지가 않으니까 당신이 책임을 지라!”는, 거의 통보에 가까운 권사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고, 곧바로 교회에 사정을 말씀드리고 12월 1일부터 미주복음방송 개국 준비에 돌입했다. 때마침 예비해 주신 후임자에게 교회의 행정업무를 인수인계하면서.
그렇게 개국멤버 몇 명이 모여 새벽까지, 그리고 다시 모여 하나부터 열까지의 모든 준비를 했다. 마침내 1991년 2월 11일, 하루 4시간의 복음방송이 전파를 타고 선포되었다. 애초의 시작은 La Mirada에 위치한 Far East(극동방송), 여러 나라 사람들이 모여 장소를 같이 사용하고 있었기에 형편이 여의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해 4월 29일에 LA New Hampshire 8가 건물로 이사를 나오게 되었다. 하루 4시간 방송을 내보내던 것이 6월에는 6시간으로, 8월부터는 8시간씩으로 발전을 하며 방송을 하게 되었다. (LA 폭동이 일어난 것은 다음 해인 1992년 4월 29일이다.)
그 과정에서, 임종희 장로님과 임수홍 권사님은 말할 것도 없으셨겠지만, 몇 가지 프로그램을 매일매일 제작을 해내야 하는 나 역시 지치고 피곤한 나머지 아프게 되었다. 매일같이 ‘운전자를 위한 기도’를 시작으로 ‘영혼의 샘터’ ‘병상을 찾아서’ ‘새롭게 하소서!’ 프로그램을 감당하려면, 많은 시간을 공기가 통하지 않는 녹음실에서 보내야 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날마다 그렇게 하다 보니 기침이 나기 시작했다. 녹음 시에는 기계를 껐다가 다시 켜곤 했고, 생방송 중에는 하나님께서 붙잡아주셨다.
밤이 되면 기침은 더욱 심해졌는데, 한 번의 기침을 할 때마다 가슴이 뜯겨 나가는 듯했다. 마치 홑이불을 빨아서 양쪽에서 힘껏 비틀어 짜는 듯이. 기침할 때마다 눈에서 불이 번쩍이고 몸이 들썩거렸다. 당연히 잠을 잘 수도 없었다. 죽을 때가 가까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죽을 병이 든 거라면, 마지막으로 식구들의 얼굴이라도 봐야 하겠다는, 도대체 무슨 병에 걸렸는지 한국에 나가서 검사를 한번 받아 봐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생각엔 3개월을 버티지 못할 것만 같았다. 누가 등을 떠민다고 해도 엎어지면 엎어질망정 한 걸음도 더는 앞으로 갈 수가 없다는 stop 싸인, 붉은 신호등을 보았다.
한국엘 나가려면 일단 사표를 내야 한다. 그러나 내 사정을 모르시는 권사님은 내가 혹시 ‘라디오 코리아’로 옮기려고 그러나 하고 염려를 하신 듯했다. 실제로 그쪽 이사로부터 나를 찾는 전화가 두 번이나 왔었다는 이야기를 나중에야 들었다. 결국, 그해 10월에 부득불 사표를 내고 서울로 왔다.
음악학원을 하는 큰언니네로 들어갔다. “아니, 어떻게 그 새에 할머니가 다 되어서 나왔냐?” 큰 형부의 탄식이었다. 핏줄은 핏줄인지, 막내 여동생이 펄펄 살아있는 가물치를 사다가 고아서 먹여주고, 큰 형부는 생삼을 사다가 꿀을 찍어서 건네주었다. 잠시나마 신학교 교수를 한 언니와 날마다 같이 예배를 드리고 아이들이 오기 시작하면 언니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나는 비어 있는 피아노 방으로 가서 모자란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는 온종일, 한구석에 앉아서 성경을 읽었다. <계속>
◇김승인 목사는 1947년에 태어나 서울 한성여고를 졸업하고 1982년 미국 이민 생활을 시작했다. LA 기술전문대학, Emily Griffith 기술전문대학을 나와 패션 샘플 디자인 등을 했다. 미국 베데스다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북미총회에서 안수받았다. 나성순복음교회에서 행정 비서를 했다. 신앙에세이를 통해 문서선교, 캘리포니아에 있는 복음방송국(KGBC)에서 방송 사역을 했다. 미주중앙일보 신춘문예에서 논픽션 다큐멘터리 부문 수상했다.
정리=
전병선 기자